• 최종편집 2022-07-03(일)
 

본지 편집국장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역사이야기Ⅱ

 

◇ 황어장터의 유래


예전 계양면소재지가 있던 인천 계양구 장기동로 향했다. 황어장터가 있는 곳이다. 황어장터는 3.1 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난 곳이다. 그런지 더욱 애틋하다.


"황어가 뭐예요?"


아들이 물었다.


"바다에 사는 잉어과 물고기야. 보통 잉어는 민물에서 사는데 바다 짠물을 먹고사는 유일한 물고기지. 숭어하고 비슷하게 생겼지만 몸색깔이 누런색을 띄고 있어서 황어라고 불렀지. 옛날에는 굴포천이 한강 하구하고 함께 툭 트여 있어서 서해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지. 부천하고 부평 근처까지 바다 짠물이 들어온 거야. 그래서 장기동 굴포천변에선 황어가 살기에 적당했고 많이 잡혀서 황어장터라는 이름이 붙여진 거야. 황어가 산란철을 맞으면 민물이 있는 곳으로 올라오는데 그때 많이 잡혔지."


"그리고 장기동의 옛이름은 황어향(黃魚鄕)이라고 했단다. 황어향은 통일신라 말기에 부평이씨의 시조인 호족 이희목(李希穆)이 사병을 기르고 이를 거느려 통치를 했던 일종의 지방자치기구였어. 이 황어향이 승격돼 수주도호부로 바뀐 거야. 그 뒤 안남도호부, 계양도호부로 명칭이 변했고 마침내 부평도호부로 바뀌어서 조선시대까지 이어지지."


장기동 시내로 들어와서 오른쪽으로 조금 꺾어 들어가자 황어장터 3.1운동 기념탑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황어장터였지. 현재는 온통 집들이 가득 찼지만 여기가 그 유명한 소장터였어. 부천의 소새장, 시흥의 뱀내장과 더불어 많은 소장수들이 들락거린 곳이지. 부천과 시흥에서 소를 끌고와서 팔고 소를 사려고 하는 사람들은 돈뭉치를 들고 여기 황어장터로 몰려들었단다"


"원래는 하루에 소 200마리 정도가 사고 팔렸는데 1910년경에는 황어장터가 번성해서 하루에 소 5∼600마리가 거래되었지. 소뿐만 아니라 여러 잡화들도 팔았는데 인천 인근에 사는 사람들하고 김포 인근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애용한 장터였어. 그리고 부천 시흥에 있는 사람들까지 다 애용한 장터여서 하루 1,000여명의 사람들로 북적거렸대. 장터에는 수많은 소들이 묶여 있고 를 먹일 여물이며 풀 같은 것들도 잔뜩 쌓아놓았다지. 그리고 소를 거래하는 거간꾼들도 눈에 불을 켜고 이리 왔다 저리 왔다 하면서 소를 거래했지."


"정말 큰 시장이었네요."


"물론이지. 시장이 그만큼 컸기 때문에 3.1 만세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일 수 있었던 거야."

 

◇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황어장터 3.1 만세운동 기념관 공원이 있는 오른편엔 물고기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황어를 형상화한 조각품이었다.


조각품에 물이 채워져 있으면 더 생생할 터인데 아쉽게도 물은 없었다.


앞을 보니 3.1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형상화한 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가운데엔 3.1운동을 형상화한 조각품이 세워져 있고, 오른편엔 당시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형상화한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왼편에는 우리나라 태극기를 형상화한 태극 문양이 역동적으로 세워져 있었다.


"기념탑을 보니 황어장터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던 분들이 생생하게 떠올라요."


"그래. 그렇지. 나도 당시 여기에서 '대한독립 만세!'을 목터져라 외치던 600여명의 계양면 사람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구나.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굳은 의지의 표현으로 일본을 몰아내고 자주 독립을 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열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 같아."

 

◇ 황어장터 3.1만세운동


"당시 황어장터 3.1만세운동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1919년 3.1일을 기하여 전국적으로 일본에 대한 만세운동이 벌어지게 된 거지. 인천에서도 최초로 3월 6일에 인천공립보통학교 동맹휴업과 함께 만세운동에 동참을 했으며, 3월 8일에는 인천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다수 배포되었지. 그렇게 해서 3월 24일이 된 거야. 이날이 황어장터 장날이었지. 당시에는 장이 오일장이어서 오일마다 장이 열리게 되어 있었어.


이날 오후 2시경 장이 파할 무렵이었어. 당시 계양면 오류리에 살던 심혁성이라는 분이 앞으로 나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을 외치기 시작했지.


그러자 장날에 온 600여명의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한 거야. 그 소리가 쩌렁 쩌렁 울려 퍼졌지. 황어장터 앞에는 당시 계양면사무소가 위치해 있었고, 일본 순사들이 지키고 있던 부내경찰관 주재소는 안쪽으로 쭉 들어가 있었지.


시장 사람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자 일본 순사들이 튀쳐나왔어. 부내경찰관 주재소에 근무를 하고 있던 이궁희삼차(二宮喜三次)라는 일본 순사하고 다른 순사 3명이 합세해서 시위주동자였던 심혁성 지사를 체포해 간 거야.


심혁성 지사가 체포되어 가는 가운데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니까 모인 사람들이 체포해가지 말라고 순사의 머리를 주먹으로 치고 돌을 던지고 저항을 하기 시작했어. 결국 사람들이 일본 순사의 손아귀에서 심혁성 지사를 빼내었지.


그렇게 격렬하게 저항을 하자 부내 경찰관 주재소 일본 순사가 칼을 빼들고 맨 앞에 섰던 이은선 열사를 푹 찔러서 죽게 만들었지. 그리고 곁에 선 윤해영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만행을 서슴치 않았어.


사람들이 갑작스런 일본 순사들의 만행에 심혁성 지사를 그대로 두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어. 그러자 일본 순사들이 의기양양 심혁성 지사를 데리고 경찰서로 연행해 간 거지. 현재 계양 우편물취급소 자리 근방에서 이은선 열사가 돌아가신 거야."


"그래서요?"

 

◇ 계양면사무소 파괴와 친일파 면서기 이응경 집 파괴


"이은선 열사가 돌아가시자 제일 분노한 분은 이은선 열사의 6촌 친척이었던 이담이라는 분이야. 바로 그분이 맨 앞에 나선 거지. 이담은 당시 계양면장이었던 안병혁과 계양면 서기였던 이경응한테 가서 통문을 써달라고 한 거야. 이들과 함께 황어 시장에 있던 송희진 집에 가서 통문 6통을 써서 각 구장에게 돌렸지. 이때 통문에는 '죽은 사람에게 동정하는 자는 집합하라'였대.

  
이 통문에 쓰여진 내용이 집집마다 전달되고 이에 전달을 받은 최성옥 지사, 전원순 지사, 이공우 지사, 임성춘 지사 등 천도교인, 기독교인, 일반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벌떼처럼 일어났지. 일본 순사가 사람을 죽였으니까 그에 따른 책임자를 처벌하고 진실규명을 해달라고 200여명이 계양면 부내경찰관주재소로 달려간 거야. 이들은 밤 10시까지 시위를 한 뒤에 해산을 했지.


그런데 남은 100여명의 사람들이 계양면사무소에 들어가 임학, 용종, 병방, 방축, 박촌리의 민적부를 불살라 버렸지. 그리고 조선인거주 등록부, 과세수호대장, 근검저축조합대장, 1918년도 주세 수시수입수납부, 1918년 연초판매 수시수입수납부, 산림보호조합세입부, 산림보호조합 세입부원부철, 축산조합 시장세금 수수서류 등 일제의 조선인 통치와 관련된 여러 서류들을 한꺼번에 불살라버린 쾌거를 이루었지.


그 뒤에 시위대는 면사무소 서기인 이경응이 집이 있는 선주지리에 까지 몰려 갔지. 통문까지 작성해 놓고 정작 시위대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격분을 한 거야. 시위대 중에서 전원순 지사는 이경응의 집 벽을 부수었고, 최성옥 지사는 대문과 벽을 파괴했대.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이경의 집을 벽을 모두 부셔버리고 가구라든가 기물들을 파괴해 버렸지. 이경응 집을 부수고 민족정기가 살아 있음을 똑똑히 보여주었지."


"그래서요?"

 

 

 

◇ 민족 지사들의 모진 고문 및 옥살이


"계양주민 40여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고 해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어. 그리하여 심혁성 지사는 징역 8월, 이담은 징역 2년, 임성춘은 징역 1년, 최성옥과 전원순은 각각 징역 10월, 이공우 벌금 20원을 받았지."


"맨처음 시위를 주도했던 심혁성 지사는 그 뒤에 어떻게 살았어요?"


"심혁성 지사는 감옥살이를 한 뒤에 논과 밭, 집을 팔아버렸대. 그 돈으로 생필품을 장만하여 장터에서 빈민들에게 나눠주었대. 자신에겐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 거지. 그 뒤 자신의 부인하고 자식들을 거느리고 산골로 은신, 전국 심산유곡을 30년 가까이 방랑하며 약초를 캐어 연명하면서 만주 등지를 내왕 애국지사들과 독립운동에 가담했대."


"왜 심혁성 지사(志士)라고 해요?"


"의사라는 말은 병을 고치는 분이 아니라 지사(志士)는 '의로운 뜻이 굳고 의로운 일을 한 분'을 가리키지. 누구도 나서지 않을 때 홀로 나서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분이고 그걸로 인해 옥살이까지 했으니까 참으로 의로운 일을 한 분이지. 그래서 심혁성 지사라고 부르는 거야. 이렇게 황어장터 만세운동에서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33명이라고 해. 이들은 모두 지사라고 불릴 자격이 충분한 분들이지."


◇ 황어장터 3.1 만세운동 전시관


황어장터 3.1 만세운동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전시관 입구에는 황어장터 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아 인천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분들을 보여주었다.


인천시 용유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최봉학 지사, 인천시 용유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정서 지사, 인천시 내리 철시투쟁의 대표자 김삼수 지사 등이었다. 그 다음에는 애국지사들의 재판기록문하고, 애국지사들의 수난을 전시해놓았다. 전시장에는 재판 판결문을 전시해 놓았다.


전시장에는 면사무소 파괴 기록들을 하나 하나 전시해 놓았다.


당시 계양산을 배경을 찍은 사진도 전시해 놓았고, 친일파 이경응 집이 있던 곳도 사진으로 찍어 전시해 놓았다. 만세운동 시위대가 이경응 집을 파괴한 내용도 적혀 있었다. 1920년대 일본 경찰서 주재소의 사진도 전시해 놓았다.


"일본 주재소는 파괴하지 않았나 봐요?"


"황어장터 만세운동이 그렇게까지 격렬하지는 않은 모양이야. 계양면사무소를 파괴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을 한 거지."


다음 전시는 황어시장에서 만세운동 중에 돌아가신 이은선 지사의 족보등도 전시되어 있고, 임성춘 지사의 제적부와 재판기록도 전시되어 있었다. 이담을 비롯한 이경응집 응징을 주도한 인물들의 제적부도 전시되어 있었다.


당시 황어장터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뒤에 계양산이 우뚝 솟아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장터에 세워놓은 소들이 그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심혁성 지사의 초상화인가 봐요?"


"응. 그래. 맞아. 짧은 머리에 눈빛이 형형한 모습이 대단하지."


심혁성 지사의 초상화를 구경하니 전시관을 다 둘러 본 셈이었다. 그렇지만 전시관을 둘러본 느낌은 너무 작고 초라하다는 것이다. 당시 황어장터의 모습도 재현해 놓고 심혁성 지사나 이은선 열사, 그리고 다른 지사들의 모습도 디오라마 같은 것으로 만들어 전시를 해 놓으면 보다 더 생생하게 당시 상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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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함성과 숨소리 느껴지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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