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8-25(화)
 

[교육연합신문=원선재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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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 찜통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을 찾다가 광명동굴을 다녀왔다. 겉으로 보기엔 그냥 에어컨 튼 것보다 훨씬 시원한 피서지였지만, 이 거대한 동굴이 일제강점기에는 우리 조상들의 눈물이 서린 곳이었고, 옛날에는 새우젓을 보관하던 창고였다는 역사를 알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아픔부터 대한민국 근대화의 눈물, 그리고 40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문화 예술 공간으로 부활하기까지,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 광명동굴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 일제강점기 징용과 수탈의 아픈 상처(1912~)

광명동굴의 옛 이름은 '시흥광산'이다. 1912년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는 우리나라의 풍부한 지하 자원을 빼앗아가기 위해 이 동굴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금, , 구리, 아연 등 귀중한 광물이 채굴되었다당시 동굴 안에서 강제로 동원되어 캄캄한 지하 갱도를 오가며 고된 노동에 시달렸던 이들은 우리의 평범한 이웃이자 조상이었다. 벽면에 빽빽하게 남아 있는 광부들의 거친 낙서와 손때 묻은 흔적들은 당시의 참혹했던 징용과 수탈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 한국전쟁의 피난처와 근대화의 역동성(1950~1972)

광산의 역사는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폭격을 피해 마을 주민들이 이 갱도 안으로 숨어들어 피난처로 삼기도 했다. 당시 동굴 안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굴댕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는 가슴 아프고도 생생한 일화도 전해진다이후 1955년부터 1972년 폐광될 때까지 이곳은 수도권 최대의 금속광산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수십 킬로그램의 황금이 채굴되는 등 대한민국의 경제 개발과 근대화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산업 현장 역할을 해냈다

 

◇ 40년의 침묵, 새우젓 창고로 잠들다 (1972~2010)

활기차던 광산은 19728월 발생한 대홍수로 인해 채광장과 주변 환경이 심각하게 오염되면서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폐광 이후 약 40년 동안 광명동굴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동굴 안은 광물이 아닌 수도권 주민들의 식탁을 책임질 새우젓을 보관하는 거대한 저장고로 쓰였다. 깜깜하고 서늘한 동굴 특유의 환경이 소래포구 등에서 올라온 새우젓을 숙성시키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 어둠을 깨고 '폐광의 기적'으로 재탄생하다 (2011~)

버려져 있던 어둠의 공간은 2011년 광명시가 이곳을 매입하면서 극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시는 역사적 가치를 살리면서 첨단 문화 예술을 입히는 도시재생 사업을 단행했다현재 광명동굴은 화려한 빛의 예술이 펼쳐지는 '동굴 예술의 전당', 시원한 지하 암반수로 채워진 '아쿠아월드', 황금이 가득했던 역사를 체험하는 '황금길', 그리고 숙성고의 역사를 이어받은 '와인동굴'까지 갖춘 대한민국 최고의 동굴 테마파크로 거듭났다. 연간 100만 명 이상이 찾는 이른바 '폐광의 기적'을 이뤄낸 것이다

 

광명동굴은 단순히 시원하고 놀기 좋은 관광지가 아니었다. 일제의 수탈이라는 슬픈 역사부터 치열했던 산업화의 흔적, 그리고 새우젓 창고로 버텨온 세월까지 품고 있는 '살아있는 박물관'이었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문화와 예술의 빛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광명동굴에서 우리 현대사의 깊은 숨결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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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지킴이기자단] 광명동굴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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