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22(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역사를 돌이켜보면, 언어와 문자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정체성의 뿌리였다. 종이에 활자를 찍고, 휴대폰 자판 위에 글자를 두드리는 오늘 우리의 일상은 사실 수천 년 전 뼈와 거북등에 새겨진 문자에서 시작되었다. 그 시작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동이(東夷)’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바다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남긴 흔적과 맞닥뜨리게 된다. 
 
□ 거북등 위의 언어
상나라 말기, 제사의 밤을 떠올려 보자. 제관이 붉게 달군 쇠침을 거북등 위에 갖다 대면, 번개처럼 균열이 번진다. 왕은 그 무늬 속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제관은 그 내용을 뼈 위에 상형으로 새겨 넣는다. 오늘날 ‘갑골문(甲骨文)’이라 불리는 세계 최초의 문자 기록 장면이다.
날씨, 수확, 전쟁, 병세, 사냥. 삶의 모든 것이 그 위에 적혔다. 그러나 이 문자는 단지 ‘중원의 문자’만은 아니었다. 고고학은 말한다. 상나라 이전, 이미 요하 유역과 산동 반도, 한반도 서북부에서 동이계의 상징과 문양이 나타났다고. 그 무늬가 글자가 되고, 글자가 체계가 되어 상나라 제사의 언어 속으로 스며들었다. 갑골문은 곧, 동이와 중원이 만난 지점에서 태어난 언어였다.

□ 바다와 강의 사람들, 동이
동이는 고대 중국 문헌에 ‘동쪽의 활 잘 쏘는 사람들’로 기록된다. 『산해경』은 그들을 ‘해가 뜨는 곳의 사람들’이라 불렀고, 『사기』는 요서와 요동, 산동에 흩어진 부족들을 그렇게 묘사했다.
그들의 삶은 물과 함께였다. 농사도 지었지만,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조개껍질과 옥으로 장신구를 만들었다. 남방과 북방을 잇는 해상 교역에도 능했다. 당연히 이런 삶은 기록 체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항로, 계절풍, 물고기 떼, 조류. 단순한 그림처럼 보이는 기호가 사실은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는 언어였던 셈이다. 오늘 우리가 갑골문에서 물결(氵), 배(舟), 물고기(魚)를 발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동이의 세계관이 새겨진 자취다.

□ 제의의 언어, 정치의 권력
동이와 중원에서 문자는 곧 권력이었다. 제사를 통해 왕은 통치의 정당성을 얻고, 균열무늬 속에서 미래를 읽었다. ‘풍년’, ‘전쟁’, ‘사냥’ 같은 글자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왕국의 운명을 가르는 질문이었다. 동이 사회에서도 제사는 중심 의식이었다. 바다와 강의 신에게 제물 바치고, 조상 영혼에게 곡식과 짐승을 올렸다. 그때 쓰인 상징은 돌, 뼈, 옥에 새겨졌고, 훗날 갑골문 속으로 흡수됐다. 문자란 곧 신과 인간을 잇는 계약서였다.

□ 자연과 함께 숨 쉬던 언어
갑골문을 보면 자연과 인간이 얼마나 긴밀했는지 알 수 있다. 해(日), 달(月), 산(山), 바람(風), 비(雨). 동이 사람들에게 자연은 단순한 자원이 아니었다. 해는 어머니였고, 바람은 메신저였으며, 비는 은총이었다. 글자는 이를 담았다. ‘雨’의 갑골문은 빗줄기와 받치는 그릇을 그렸고, ‘風’은 바람 속에 깃든 벌레를 표현했다. 인간과 자연이 한 호흡을 나누던 시절의 언어였다.([그림 7] 참조)

□ 증거는 형태와 유물 속에
중국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을 확대해보면, 단순한 직선과 곡선이 아니다. 해와 달이 겹쳐 있는 독특한 조형이 있다. 그런데 그 모양은 요하 유역 홍산문화 옥기 무늬와 닮아 있다. 고고학자 장광지는 “문자는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라, 도상문화의 축적 위에서 세워진다”고 했다. 갑골문의 해(日) 점 하나, 달(月) 곡선 하나는 신석기 도상에서 이어진 것이다. 문자 탄생은 단순한 발명이 아니라 긴 문화적 기억의 집합이었다.
산동 반도의 토기, 요동의 청동기, 홍산의 옥기에서 발견된 기호들 역시 갑골문과 겹친다. 중국 학계도 인정하듯, 문자는 ‘황하 문명 단일 중심’에서만 나온 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동시에 피어난 다중 중심의 산물이었다.

□ 언어의 흔적, 이동하는 문화
언어학자들은 갑골문 속 일부 발음이 현대 중국어보다 오히려 한국어나 일본어의 옛말과 가깝다고 말한다. ‘바다(海)’, ‘물고기(魚)’, ‘배(舟)’ 같은 어휘가 그렇다. 갑골문은 문자일 뿐 아니라, 언어의 교류 흔적이기도 하다. 동이계 부족이 남하하거나 동진하면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이주했을 때, 그 언어와 문자가 함께 전해졌다. 고조선과 삼한, 일본 고훈 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기호들이 이를 뒷받침한다.([그림 7] 참조)

□ 문화의 흡수와 소멸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융합과 동시에 소멸을 불러왔다. 주나라가 변방 부족을 제후국으로 편입하면서 언어와 문자는 표준화되었다. 동이 제관이 새기던 갑골문은 궁정 속 전서체로 바뀌었고, 그의 아들은 그것을 ‘옛 글자’라 부르며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문화는 흡수되고, 기억은 단절되었다.

□ 다시 발견된 동이의 목소리
20세기 초 은허 발굴 이후 갑골문은 ‘중국 최초의 문자’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요하문명과 산동·요동 해안, 한반도 서북부에서 연이어 발견된 부호들은 그 통설에 균열을 냈다. 어떤 연구자는 발굴 현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건 중원의 언어가 아니라, 동이족의 목소리입니다.”
그 말은 곧, 갑골문이 특정 왕조의 소유물이 아니라 동아시아 문명 전체가 공유한 유산이라는 선언이었다.

□ 문자, 정체성의 뿌리
왜 오늘날 우리가 다시 갑골문을 읽으려 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고대학자의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문자는 정체성의 뿌리이자,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것은 곧 우리가 누구인가에 답하는 일이다. 동이의 문자 전통을 복원하는 것은, 잊힌 세계관을 복원하는 것이다.

□ 뼈 위의 기억에서 미래의 언어로
문자는 과거의 유물인 동시에 미래의 가능성이다. 뼈 위에 새겨졌던 갑골문이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오늘의 한글과 디지털 코드로 이어졌다. 언젠가 우리는 다시, 우리 손으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낼 것이다. 뼈 위에 새기던 그 날카롭고 간절한 손길을 기억하는 한, 우리의 언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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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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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뼈 위에 새겨진 동이의 기억, 오늘을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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