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R 쾌속선이 오사카역을 떠나 서쪽으로 거침없이 달린다. 차창 밖으로 고베와 아카시의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80km를 씩씩하게 달려온 지 약 한 시간 뒤 히메지역에 닿는다. 이른 시간이지만 역에는 이미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곧게 뻗은 오테마에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천천히 걷는다. 거리 곳곳에는 히메지성 안내 깃발과 치미 장식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소소함이 담긴 플리마켓의 웃음소리와 하모니카를 부는 원숭이의 익살스러운 몸짓이 즐거움을 더한다.
4월의 공기는 부드럽고 따뜻하다. 막 물이 오른 나무들은 연둣빛 생기를 더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잎사귀들은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렇게 1km를 걷다 보면 도로 끝에 눈부신 하얀 천수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백로가 날개를 펼치고 내려앉은 듯한 풍경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하얗고 강인한 히메지성을 ‘백로성’이라 부른다.
내성 해자에 둘러싸인 하얀색의 히메지성
히메지성은 오사카성, 구마모토성과 함께 1993년 일본 최초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특히 히메지성은 17세기 에도시대 성곽 건축의 정수를 간직한 곳이다. 또한 현존하는 일본 국보 중 5층 천수각을 지켜온 히메지 성은 규모도 크고 보존도 잘되어 독보적인 위용을 자랑한다. 히메지 성 지붕의 배치와 구조는 쇼군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고, 막부의 강력한 상징을 보여준다.
흰 회벽은 우아하면서도 단단하고, 화재 방지와 방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복잡하게 얽힌 통로와 83개의 수많은 방어 구조물은 전쟁의 긴장감을 지금까지 품고 있다. 성 안으로 들어서면 길은 곧게 이어지지 않는다. 적이 쉽게 중심부에 닿지 못하도록 일부러 구불구불하게 설계된 길이다. 벽마다 뚫린 총안과 활구멍, 높게 치솟은 석벽은 이곳이 도쿠가와막부의 중심인 에도를 지키는 방어 거점이었음을 말해준다.
누문 형태의 출입구 히시노문은 성의 21개의 문 가운데 가장 큰 문이다. 이 문을 들어서서 니노마루와 혼마루를 거쳐 천수각으로 향하는 길은 조용하고 적막하다. 내부에는 조명도, 기념품 가게도 없고 단순하다. 신발을 벗고 가파른 나무계단을 한 걸음씩 오르다 보면 오래된 목재의 향이 은은히 배어 나온다. 를 지나는 삐걱거리는 나무 소리마저 세월의 숨결처럼 느껴진다.
하얀 회벽의 히메지성 천수각
천수각 가장 높은 곳에 서니 히메지 시내와 멀리 하리마 평야, 잔잔한 세토내해까지 한눈에 펼쳐진다. 성 아래로는 단정한 시가지가 이어지고, 벚꽃과 숲이 성곽을 감싸 안는다. 바람은 높고 맑았다. 수백 년의 시간이 그 자리에서 천천히 흐르고 있는 듯했다.
천수각 뒤편, 절벽 위 활처럼 둥글게 휘어진 기다린 창고 형태의 방어시설은 코사쿠루와이다. 천수각 아래쪽 적의 침입을 막는 구조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설이다. 장기 농성에 대비해 70여 톤에 달하는 쌀과 소금을 저장했다고 한다.
반슈 사라야시키의 오키쿠 우물
천수각 아래에는 오키쿠 우물이 있다. 지금은 소원을 비는 장소가 되었지만, 이 우물에는 오래된 원혼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괴담인 반슈 사라야시키의 무대다.
다이묘의 집안에 열 개의 귀한 접시를 관리하던 하녀 오키쿠는 어느 날 접시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누명을 쓴다. 주인의 욕망을 거절한 대가로 억울한 벌을 받고, 결국 깊은 우물 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 뒤로 밤마다 우물에서는 “하나… 둘… 셋…” 하고 접시를 세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아홉까지 센 뒤 멈추는 슬픈 목소리. 끝내 다 셀 수 없었던 억울함과 한이 우물 아래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여성의 억울한 죽음과 원혼의 등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아랑전설이나 장화홍련전과도 닮아 있다. 남성 지배 계급의 폭력, 권력과 욕망 속에서 희생된 여성은 죽어서야 진실이 드러난다. 다만, 아랑이나 장화홍련전의 경우 억울함이 풀리는 해원에 닿아 있다면, 오키쿠의 이야기는 끝내 풀리지 못한 원한으로 남는다. 일본 공포물 특유의 서늘함도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는 듯하다.
나룻배로 바라본 히메지 성벽
히메지 성 내부 해자를 따라 와센이라는 나룻배를 탔다. 스게가사라는 전통 대나무 모자를 쓰고 성을 한 바퀴 돌았다. 물결은 잔잔했고, 남은 꽃잎들이 수면 위에 흩날렸다. 가이드 겸 뱃사공이 선미에서 노를 잡고 천천히 나아간다. 배 위에서 올려다본 천수각은 더욱 웅장했다. 가까이 다가선 석벽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물과 바람, 돌과 나무가 함께 만든 풍경이었다.
길 건너 코코엔에 들어서자 또 다른 시간의 문이 펼쳐진다. 옛것을 좋아한다는 코코엔(好古堂). 히메지 출신 역사학자 나카무라 쇼토의 호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무사 가문의 저택 자리에 남은 유물을 살려 새롭게 만들어 낸 온고지신의 정원이다. 번호 매긴 안내판이 곳곳에 잘 되어 있어 길 찾기가 쉽다.
담장으로 구획된 아홉 개의 일본식 정원은 저마다 다른 계절의 표정을 품고 있다. 회랑을 지나 연못가에 서면 오색잉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작은 폭포 소리가 잔잔하게 귀를 적신다.
코코엔의 오색잉어
모퉁이를 돌 때마다 풍경은 조금씩 달라진다. 흐르는 물과 그림자, 흔들리는 대숲과 휘어진 소나무가 느린 시간을 만들어낸다. 대숲 사이를 스치는 바람은 사각사각 낮은 소리를 남기고, 가레산스이 정원의 모래결은 물 한 방울 없이도 잔잔한 파문을 그려낸다. 가레산스이는 선종 교리가 재해석된 일본의 전통 정원이다. 바위와 모래, 이끼가 만든 흔적을 바라보며, 극도의 간결함 속에서 고요를 느낀다. 바람소리 물소리, 그 차분함을 즐기며 다실 ‘코코안’에서 말차 한 잔을 마셨다. 쌉싸래한 차향과 달콤한 화과자가 입안에 번지고, 정원에는 봄빛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다. 오래 머물고 싶은 오후였다.
미술관 가는 길 히메지성의 조각상
히메지 시립 미술관은 히메지성 뒤쪽에 있어 들러보기 좋은 곳이다. 미술관 가는 길, 히메지성을 배경으로 지붕의 장식품을 만날 수 있다. 새하얀 백로성 앞에 자리 잡은 붉은 벽돌, 시간의 결이 다른 두 풍경이 나름 조화를 이룬다. 강인함과 우아함이 한 공간 안에서 나란히 숨 쉬고 있는 듯하다.
미술관 건물은 메이지 시대에 창고로 지어진 뒤, 2차 대전 이전에는 군 시설로 사용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시청으로 쓰였다. 오래된 붉은 벽돌, 시대의 흔적을 품은 건물은 1983년 봄, 지역사회에 예술을 가까이 전하고자 시민들을 위한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은 물론, 서양 화가들의 작품까지 폭넓게 소장하며 히메지의 대표적인 문화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히메지 미술관의 붉은 벽돌
관내에는 상설 전시실과 기획 전시실, 컬렉션 갤러리가 조용히 이어지고, 누구나 자유롭게 머물 수 있는 아트 라이브러리에는 느린 오후의 공기가 흐른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미술관 정원이다. 잔디와 나무 사이로 13점의 조각 작품이 자연스럽게 놓여 있다. 사람들은 작품 곁을 천천히 걸으며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이들은 조각 사이를 뛰놀고, 여행자는 벤치에 앉아 계절의 바람을 느낀다. 미술이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일상의 풍경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이곳은 조용히 보여준다.
효고현 남서부에 자리한 히메지는 예로부터 혼슈를 동서로 오가는 길목이었다. 사람과 물자가 모이고 흩어지던 교통의 중심지였기에, 자연스럽게 문화와 역사가 켜켜이 쌓였다. 웅장한 성곽과 오래된 거리, 바다의 풍요와 예술의 숨결까지 함께 살아 있는 도시. 붉은 벽돌 미술관 앞에 서서 다시 히메지성을 올려다본다. 하얀 천수각과 붉은 벽돌의 대비가 오래도록 눈에 남는다. 서로 다른 시대와 기억이 한 풍경 안에서 조용히 어우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