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어릴 적 나는 “법은 물처럼 흘러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물이 굽이쳐도 끝내 바다로 흘러가듯, 법도 억지로 틀을 짜 맞추기보다 자연스러운 흐름과 공평함을 지녀야 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마주한 현실은 달랐다. 법은 종종 불공정했고, 정의와 거리가 멀었다. 법정의 판결이 “옳음”과 “그름”을 나눈다기보다 권력과 이해관계에 따라 기울어져 있다는 체험은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법은 본디 무엇이었을까? 문자학의 눈으로 ‘법(法)’이라는 한자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놀랍게도 오늘의 법이 잃어버린 무언가가 보인다. 갑골문과 금문 속 ‘법’에는 신수(神獸), 곧 해치(獬)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 해치(獬), 옳고 그름을 가르는 짐승
해치는 전설 속 동물이다. 뿔이 하나 달린 짐승인데, 사람 사이에 시비가 벌어지면 반드시 그 가운데 옳은 사람을 알고, 그쪽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반대로 잘못한 자에게는 뿔로 들이받아 징벌을 가했다고도 전한다. 그래서 중국 고대의 재판 이야기를 담은 문헌들에는 해치가 법정 옆에 있었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심지어 관복에 해치 무늬를 새겨 넣어 “나는 공정하게 판단하겠다”는 다짐을 상징하기도 했다.
갑골문 속의 ‘법’자는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水), 해치(獬), 그리고 거(去). 물은 평평히 흐르는 성질, 곧 공평함을 뜻했다. 거는 제거한다는 뜻, 곧 불의와 부정을 없앤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해치는 정의의 화신이었다.
세 요소가 함께 있을 때, 법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신성한 정의를 상징했다. 오늘날 법에 대한 회의적 인식과 달리, 고대의 법은 적어도 문자 속에서는 자연법적·정의론적 기초를 품고 있었던 셈이다.
□ 사라진 해치, 남은 법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문자는 단순화되고 통일되었다. 진시황의 문자 정리 과정에서, ‘법’에서 해치가 빠져나갔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法자는 물(水)과 거(去)만 남아 있다.([그림 12] ‘法’ 참조)
이 변화는 단순히 글자의 획수가 줄어든 문제가 아니다. 법이라는 개념에서 정의의 상징이 지워진 것이다. 이제 법은 해치의 뿔 같은 초월적 기준이 아니라, 국가가 정한 규칙을 뜻하게 되었다. 법이 곧 정의라는 자연스러운 연상이 약해지고, ‘성문법’과 ‘실정법’이라는 제도적 의미가 강화된 것이다.
우리가 법정을 떠올릴 때, 판사 뒤에 앉아 있는 해치 대신 국가의 문장(紋章)이나 국기가 걸려 있는 모습은 이 전환의 문화적 결과다.
□ ‘율(律)’이라는 또 다른 길
법과 짝을 이루는 글자로 ‘율(律)’이 있다. 이 글자 역시 흥미롭다. 갑골문을 보면, 손이 붓을 들고 길(道)에 무언가를 적는 형상이다. 곧 “길을 글로 적는다”, 다시 말해 사회의 질서와 규범을 문서로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출발했다.([그림 12] ‘律’ 참조)
따라서 ‘율’은 처음부터 성문법, 제정된 규칙의 세계를 가리켰다. 반면 ‘법’은 본디 자연스러운 정의, 해치가 상징하는 옳고 그름의 감각을 담았다. 그렇다면 고대 사회에서 법과 율은 서로 보완적 관계였다. 하나는 정의의 원칙, 다른 하나는 그 원칙을 글로 고정하는 장치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법 체계는 ‘율’, 곧 성문화된 규범 쪽으로 훨씬 기울어져 있다. 법조문이 두껍게 쌓이고, 조항이 무수히 늘어날수록, 해치의 자리는 더욱 희미해졌다.
□ 이름의 흔적 - ‘해태’는 왜 해치인가
여기서 흥미로운 음운학적 문제도 나온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해치를 ‘해태’라고 부른다. 마치 잘못된 이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대의 운서(韻書)와 사전 기록을 보면, 獬(해)의 발음은 시대에 따라 [태], [해], [치] 등으로 달라졌다. 즉 [해태]라는 발음은 전승 과정에서 나온 오류가 아니라, 역사적 음운 변화의 산물이었다. 서울 광화문 앞의 돌짐승 ‘해태’는 그래서 결코 잘못된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 변화를 품은 문화사의 흔적이라 할 만하다.
□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에서
문자학적 분석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해치가 포함된 ‘법’은 자연법적 의미, 곧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초월적 기준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문자에서 해치가 제거되면서, 법은 점점 성문법과 실정법의 세계로만 기울게 되었다.
물론 문자의 단순화는 행정 효율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법이 정의의 상징을 잃어버린 것은 문화적 손실이기도 하다. 이제 법은 권력이 정한 규범을 집행하는 제도적 장치로만 이해되기 쉽다. 법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우리의 체감은, 어쩌면 갑골문 속 해치의 부재와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 오늘의 법, 그리고 잃어버린 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법치’를 강조하는 목소리는 크다. 그러나 그 ‘법치’가 과연 정의를 보장하는지는 늘 의문이다. 권력자에게 유리한 판결, 돈에 따라 달라지는 법의 무게를 보며 사람들은 법을 불신한다.
이럴 때 갑골문 속 해치의 그림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 법은 본래 물처럼 공평해야 하고, 불의를 제거해야 하며, 무엇보다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신성한 눈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법의 제도적 개혁만이 아니라, 법에 내재된 정의의 상징을 복원하려는 문화적 성찰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법은 다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 맺으며
법(法)의 옛 그림은 단순하지 않았다. 물(水), 제거(去), 그리고 해치(獬). 그 셋이 함께 있을 때 법은 비로소 법다웠다. 해치가 사라진 뒤, 우리는 규칙만 남은 법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효율적일지 모르나, 때로는 정의를 잃은 빈 껍데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신문 지면마다 터져 나오는 법의 불공정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다시 광화문 앞의 돌해태를 떠올린다.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약간은 귀여운 그 모습. 하지만 그 뿔은 여전히 곧게 하늘을 향해 있다.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법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눈과 뿔을 되찾을 때, 비로소 진정한 법이 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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