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4(토)
 

[교육연합신문=임오숙 기고]

기성세대는 우리말인 국어를 학원에서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사교육의 1번지인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서는 국어 설명회가 가장 빨리 마감될 정도로 국어 사교육이 성업 중이라고 합니다. 초등 취학 전 아이들조차 학습지로 우리글을 배우고, 독서도 사교육으로 배우며 모국어인 국어조차 전 생애 주기에 걸쳐 사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러한 상황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언제부터인가 우리 모두는 핑계와 변명을 찾기만 합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학부모, 교육제도, 아이들에게서 그 원인을 찾으며, 이론과 관련지으며,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처럼 치부만 하고 있지는 않는지 가슴이 먹먹할 때가 있습니다.
     
국어를 가르치는 현장 교사들은 요즘 학생들이 글은 읽을 줄 알지만 그 안의 생각과 뜻을 이해하지 못해 ‘문맹이 됐다.’는 말을 합니다. 국어의 4대 영역인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에서 전반적인 장애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부의 수능 정책, 양으로 승부하는 독서 지도, 맥락과 배경지식까지 외우는 현실에서 기인하지는 않았을까요?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국어의 기초 개념은 70% 이상 초등학교 때 익혀야만 중·고등학교에 가서 비평적인 읽기 및 쓰기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우리말의 70%, 학술용어의 90% 이상이 漢字語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역사 속에서 2,000년이나 사용해왔던 漢文은 반세기도 안 되는 기간에 완전히 외국어가 되어 버린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초학자들의 한문 공부를 제대로 가르칠 만한 선생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초학자들이나 중급자들이 무엇을 가지고 공부해야 할지를 모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글자를 배우는 목적이 어디에 있을까요? 글자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이치를 깨우쳐서 제 갈 길을 스스로 찾아 가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그래서 ‘習’은 외우는 것이 아니라, 배운 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실천을 하고, 나아가 주변으로 넓혀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운 것과 실천을 별개로 여기는 우리의 현실!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한문교사들의 학습지도는 한자의 훈과 음을 가르치는 수준이며, 한문 급수 시험이 훈과 음만을 알아맞히는 급수 시험으로 전락된 행태는 또 다른 무지의 소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직 훈과 음을 붙여 ‘天(하늘 천)이라고 외우고 쓰기보다는 글자를 배우는 목적을 살리며 그 속에 담고 있는 세상 살아가는 이치까지 깨달아 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모르는 것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뜻은 멀리 두고 외우기만 하는 교육방식이야말로 얼마나 답답하고 황당한지 모릅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학교에 보내는 부모님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분별이 안 되는 사람을 節(철)부지라고 합니다. 知識이라는 말도 知(알 지), 識(알 식)입니다. 똑같이 ‘안다.’는 의미인 두 글자를 왜 썼을까요? 知는 바르게 정확히 아는 것이고, 識은 대화에서 상대방이 하는 말과 소리가 이치에 맞는지를 구별해서 받아들일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한자는 표의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글자인데, 뜻을 모르고 무조건 훈과 음을 외우게 하는 교육 방법은 방향을 상실한 국민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현재 초․중학교 교과서에 쓰인 한자어는 한글전용으로 쓰여 있으나 그 의미는 한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說(말씀 설)은 言(말씀 언)과 兌(기쁠 태)로 구성되어 있어서, 말이란 듣는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種(종자 종)’이라는 글자도 禾(벼 화)+重(무거울 중)의 합체자로, 볍씨를 소금물에 넣어서 가라앉는 것만 골라서 종자로 썼다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한자는 우리 조상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문화이고 유산입니다. 더 나아가서 ‘泉(샘 천)’은 자연스럽게 물이 퐁퐁 나오면서, 공기와 만나서 공기방울지면서 물이 하얗게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그린 것이다. 그래서 글자는 인류의 생활사인 것입니다. 
 
한글만 아는 사람보다 한자까지도 아는 사람은 생각의 깊이와 인성이 함께 자라게 됩니다. 한자는 생각의 도구이고 한자어는 그 모양 자체가 세상의 이치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자 공부는 모양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한 사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로부터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를 배워서 그대로 본받는 것입니다.

 

한자를 안다는 것은 우리말을 더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국어 어휘의 70%, 학술 용어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자어인데도 한자어 교육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한글만 알아도 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 있다고 잘못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한자와 한글 공부를 병행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뜻도 모른 채 외우기만 하는 현실에서 낱말의 뜻을 스스로 찾고 익히면서 삶의 방식을 스스로 찾아가는 이해식 학습으로 문을 열어야 합니다.   시험을 보고 나면 흔적도 없이 머리와 몸에서 사라지는 암기식 공부를 언제까지 후손에게 유산으로 남길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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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글과 漢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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