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상전에 겸괘를 보면 ‘땅 속에 높은 산이 들어 있다. 즉 낮은 자세 속에 높은 덕이 가려져 있다는 뜻이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많은 것을 덜어내어, 적은 것에 보태고, 사물의 높고 낮음을 잘 저울질하여 그 베풂을 평균적으로 행해야 한다. 겸괘의 ‘겸(謙)’은 言(말씀 언) + 禾禾(벼화, 많은 벼)가 합한 회의자이다. 손이 많은 벼(禾禾)를 쥐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도 ‘이거 얼마 안되지만…….’하며 겸양의 말(言)을 해서 겸소의 의미가 되었다. 따라서 ‘겸(謙)’ ‘겸손’이다. 산이라는 높고 큰 물건이 땅 아래에 있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땅 속에서 자기가 스스로 멈출 줄 알고, 밖으로는 유순한 태도를 취하는 모습이 겸손의 자세다. 높은 산이 지면 아래에 있는 것도 지고한 가능성(잠재성)을 지닌 자가 몸을 극도로 낮추는 모습이니 바로 겸손의 이미지다. 
 
노자의 『도덕경』 8장에 ‘상선약수(上善若水)’란 말이 있다. 여기서 노자는 물과 같은 삶을 강조했는데, 물이 가진 겸손의 철학이다. ‘모든 삶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남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이 가장 높은 것일 수 있다. 역설의 미학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겸손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이솝 우화』에 있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강둑에 뿌리를 박고 듬직하게 자라고 있던 참나무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를 보며 비웃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다니, 너희는 어쩌면 그렇게 연약하니? 나를 좀 봐. 어지간한 바람에도 끄떡없잖아.” 참나무의 비웃음에 갈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엄청난 태풍이 불어 왔습니다. 태풍에 맞서 끝까지 버티던 참나무는 뿌리째 뽑혀 강물에 떠내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나무는 태풍에도 아무 일 없는 갈대들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습니다. “내가 이렇게 뿌리째 뽑혔는데 어떻게 너희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지? 믿을 수 없어!” 갈대들이 그런 참나무를 보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너처럼 미련하게 힘만 믿고 버티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거야. 우리는 언제 얌전하게 고개를 숙여야 할지 안다고.” 쓰러진 참나무를 보고 갈대들은 자기들이 강해서 살아남았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렸습니다. 그때 아이들이 쓰러진 참나무 주위로 몰려와서 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재미삼아 옆에 있던 갈대들을 한 움큼씩 잡아 뜯어서 이리저리 함부로 내둘렀습니다. 뽑혀 버려진 갈대들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그만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참나무가 갈대를 비웃었지만 결국 참나무는 태풍에 뽑혀 강물로 떠내려간다. 그에 비해 갈대는 겸손하게 피해 갔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갈대도 참나무에게 자랑을 했고, 그 결과 아이들에 의해 뽐혀 말라 죽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만과 오만보다 겸손한 자세가 생존과 번영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세상엔 영원한 강자도 없고, 영원한 약자도 없다. 다만 겸손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잠깐! 샛길로. 얼마 전 김칫독에 김치를 눌러 놓는 볼품없는 넓적한 돌에다 ‘세심(洗心)’, ‘하심(下心)’ 중 ‘세심(洗心)’으로 붓을 그었다. 그런 다음 사진을 찍어 수석 채집하는 친구에게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이윽고 ‘카톡’하고 소리를 내며 답장이 왔다. “돌에다 낙서하는 것 아니야. 돌은 그냥 무심하게 보아야 해. 그런 경지가 돌봄이지” 하면서 자기가 왜 교육계의 무한 돌봄(중의적인 의미가 있다. 살펴보는 것, 수석을 보는 것)인지 알려 주겠다고 초대장을 날렸다. 필자는 카톡을 받고 당황했다. 물론 옳은 말이다. 그러나 필자가 돌에다 쓴 말이 낙서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생각해서 신중히 고른 나만의 활구(活句)였다. 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려고 쓴 것인데, 그렇게 낙서로 생각했다니 그게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카톡의 말은 필자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돌도 인간처럼 처음에는 산중턱의 엄마돌인 바위에서 떼어져 나와 계곡으로 구르고 돌끼리 부딪히며 날카로운 부분들을 떼어내고 서로 부딪히며 갈고 닦아 동글동글한 자갈도 되고 조약돌도 된다. 인간도 거칠게 태어나서 사회생활을 통해 감정을 조절하고 절제하면서 마음이 둥글-동굴해진다.’며 자기의 인생 철학을 요약하여 말했다. 사람은 살면서 겸손해진다. 또 그래야만 한다. 붓다의 길이 그랬다. 이른바 ‘절대적 탈영토화’의 길이다. 정복이 아니라 공감, 쾌락이 아니라 지복, 증식이 아니라 비움, 유한이 아니라 무한을 향해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원초적 자기 중심성은 완벽하게 해체된다. 그 중심에는 겸손이 자리하고 있다. 
 
겸손은 들레즈의 말을 빌면 ‘절대적인 탈영토화’를 통해 얻어지는 덕성이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흐름을 따라가면서, 겸손은 점차 이루어진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중심성을 버리고, 서로의 관계와 연결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떤 그릇에 담겨 있느냐에 따라 모양이 바뀌는 것처럼, 겸손한 사람은 다양한 상황에 적응할 수 있다. 겸손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을 열어준다. 
 
겸손은 향기로운 꽃이다. 겸손하고 존중과 친절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려는 의지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행복과 성취를 찾을 수 있게 해주는 덕성이다.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에 담긴 겸손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 겸손한 속성이 있는가 하면 모자란 곳을 메워주고 깨끗하게 만들기도 한다. 억지로 그 흐름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좁고 꼬불꼬불한 길도 잘 흐른다. 물은 형체가 없다. 한 가지로 고정되고 경직된 모습이 아니다. ‘정해져 있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물의 속성이다. 이것은 겸손의 속성이기도 하다.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그 모양이 변한다. 
 
주역의 지산겸 효사(초6)에도 보면 ‘겸겸 군자’라 했다. 겸손하고 또 겸손하라, 군자여! 겸손이야말로 세상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겸손을 멀리하고 오히려 자기 PR을 하라 한다. 시대가 변하면 과거의 사상이나 철학이 고리타분해진다. 그러나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 했다. 옛것을 본받아 새롭게 창조한다는 것이다. 주역에서도 효사(상6)에 보면 겸손을 무시한다면 군대를 일으켜도 무방하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모든 것들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즐기고 호의호식하는 데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물처럼 겸허한 마음을 가지면 어떨까? 물처럼 겸허한 마음이란 남에게 下心으로 대하고 자기에게 洗心으로 대하는 마음이다. 그러면 겸손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고조선, 우리 옛 선조들은 넓은 벌판처럼 그 마음이 항상 비어있고 겸손하고 서로 양보할 줄 알았다. 오늘날 한국인의 품성도 선조들의 덕성을 이어받아 공동체 정신의 기반을 형성하는 디딤돌이 됐다. 봉우리보다는 바다를 보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자. 하심(下心), 세심(洗心), 여수(如水) 세 단어는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활구(活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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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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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겸손-높은 덕이 낮은 자세 안에 숨어있는 향기로운 꽃(지산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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