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4(토)
 

[교육연합신문=文德根  漢字語敎育硏究所長]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 는 우리 민족(民族)이 가장 사랑하는 시로 손꼽힌다. 핵심 시상은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을 느끼기에 화자는 ‘세상의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하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고 선언(善言)한다. 

 

부끄러움은 유교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 맹자(孟子)는 부끄러움을 인간다움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부도덕한 행동(行動)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타인의 악행에 분노를 느끼는 마음’이 인간의 본질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워질 일이 없다’고 역설했다.

 

부끄러움은 외부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한 집단이 설정한 도덕(道德 기준을 어기거나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줬을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共感) 능력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지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공동체(共同體)라는 의식이 없으면 부끄러움도 자연히 사라지는 것이다.

 

어쩌다가 타인의 고통쯤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회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자랑스러운 역사만이 역사일 수는 없다.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다. 자랑스러운 역사는 배우고 계승하면서 그 전통을 오래도록 보존해야 할 것이며, 부끄러운 역사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철저히 반성하면서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중요한 이유이고 목적이다. 그래서 역사는 직시(直視)하고 직서(直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배우자’는 말이 표어인 사회가 되어버렸다. 누구의 잘잘못인지 구별 없이 자랑스러운 역사만 기억한다고 해서 부끄러운 역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부끄러운 역사를 왜곡하고 은폐하여 자랑스러운 역사로 만든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운 역사일수록 사실 그대로 더 기억해야 한다. 부끄러운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 반성도 없게 되고, 반성이 없으면, 지난 잘못은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역사는 발전하지 못하고 퇴행(退行)하기 마련이다.

 

요즘의 세태는 법망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부끄러운 일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유명한 로펌을 사서, 법에서 무죄를 받으면 부끄러움은 면하게 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모든 것을 돈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는 현실에 쓴 소리하는 원로들은 모두 산으로 은둔했단 말인가? 어찌 생각하면 은둔은 가장 비겁한 일인지도 모른다. 恥(부끄러울 치)라는 글자도 耳와 心으로 구성되어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을 듣고 마음에 느끼는 떳떳치 못한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가 경제적(經濟的) 거래로 바뀌었다. 거래 관계는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취급한다. 감탄고토(甘呑苦吐)의 사회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람조차도 하나의 도구로 간주하는 이 사회에서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사라져버렸다.

 

‘공부를 잘해야 돈을 많이 번다.’ ‘의사가 되어야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다.’ ‘돈을 벌어야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버린 사회는 당연히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 돈이 주인 된 사회에서는 부끄러움과 배려가 사라지게 마련이다. 사람의 관계와 만남이 없는 사회에선 부끄러움이 없다. 가족끼리 식사를 해도 휴대전화만 작동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부끄러움이 회복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자기의 행동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 때, 비로소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먼저 행동하는 사회, 멈춰 서서 돌이켜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하다. 부끄러움과 배려의 사회는 만남이 곧 목적이 된다. 이렇게 공동체가 회복되어야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역사가 말해주듯이 인간의 존엄을 신발 한 켤레로 바꾸어 버린 사회는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존엄이 사람의 길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마음의 길을 갈고 닦고, 또 따라가야 한다. 그 길을 닦지 않으면 잡풀이 나는 것이다.

 

‘저렇게 해야 하겠구나!’ ‘저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고 분별하여 실천하는 지혜를 스스로 익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반부논여(半部論語)라는 말이 있다. ‘天下를 일으키는데, 논어 반 권만 읽으면 되고, 天下를 지키는 데에도 논어 반 권이면 된다.’는 말이다. 좋은 글이란 우리에게 통합적 안목을 제공하고 우리 생활의 좋은 방편이 되는 것이다. 좋은 글은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주는 보고인 것이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고 용기 있게 실천하는 사회가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가 아닐까?

 

하늘과 땅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배움이고, 이를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르침일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부끄러움을 내치는 용기 있는 사회로 거듭나는 것은 오직 바른 배움과 가르침으로 시작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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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끄러움과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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