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4(토)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우리는 어쩌면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에 가고,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한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에 대한 사고의 다름으로 인해 갈등이 일어나고, 그 갈등의 해결 과정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소외와 섭섭함은 지역과 세대 그리고 사람 사이에서 대화조차도 잃게 하는 불신과 증오의 악으로 치닫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고 그 자체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 

    

해결을 위한 생각? 아니 문제 자체에 대한 관심마저도 희미해지는 요즘이 아닌가? 밖으로는 고민을 쏟아내면서도 안으로는 이러한 현상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과연 없는 것일까?

 

진보와 보수를 표방하는 신진과 기존의 갈등, 부모와 자녀간의 불신, 경영자와 노동자 간의 대립, 학생과 교원간의 심리적 갈등과 좌절로 속출하는 학생들의 자살, 땅에 떨어진 스승과 학교의 권위는 어떤 결과를 잉태할 것인지에 대해 답을 찾는 숙고의 과정은 없고, 각자가 책이나 남의 이야기를 베껴서 토하고만 있지는 않은가?

 

흔히 이러한 책임을 거의 교육에 묻고 있으면서도 철학과 자질이 우수한 교육 지도자는 숨어버리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육! 세대를 넘어선 우리 모두의 영원한 화두이다. 화두가 되면서도 지금의 교육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학생이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교사와 친하지도 않으며, 학습의 곤란에 괴로움을 느낄 뿐, 그 대처과정에서 어려움을 스스로 이겨내고 보람을 찾는 과정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말로는 세상을 냉혹하다고 하면서 온실만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은가?

 

스승과 제자의 본분을 '禮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잘못된 행동이 일어난 후에 책망하고 금지시키면 반감으로 이겨내지 못하고, 시의적절한 때를 놓친 뒤에 가르치려 하면 학습에 힘만 들 뿐 성과가 없으며, 이것저것 너무 많이 가르치려만 하면 머리가 어지러워져 순서대로 학습이 제대로 안 된다.’면서 교육의 폐해로 지적하고 있음을 한번쯤은 상고해봄직하다.

 

스승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좋은 학생이 될 수 있는가? 스승의 권위가 서야 그 가르침도 존귀해진다는 ‘師嚴道尊’이라는 말은 스승으로서의 엄격한 자질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스승에 대한 존경은 구걸하고 강요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거듭나는 처절한 産苦의 과정을 겼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는 학문에 대한 깊고 폭넓은 이해와 경험이 농축되어야 한다. 그래서 뿌리까지 철저히 파헤쳐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과 재미있는 방법으로 다가서는 자세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학습 동기는 쉽고 재미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차가운 물에 손을 넣어보고 뜨거운 불에 가까이 가보아야 그 사물의 이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내고 그 변화 이치를 배우고 난 다음 실제로 그 변화가 주는 수많은 결과들을 다시 공부하고, 삶 속에 녹여 내야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식물을 잘 기르려면 그 식물이 어느 정도의 물과 햇빛 그리고 어떤 토양을 좋아하는지를 먼저 배우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다음에  體가 갖추어져 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운전을 해보지도 않은 사람에게 운전대을 맡기자고 외치는 사람, 또 그 사람에게 박수를 치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루에도 오만 가지’라는 말이 있듯이 책상에서는 한 가지이지만 실재에서는 수만 가지가 되는 것이 일상이다. 이는 실제로 해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실천해 보지 않은 배움은 허공을 맴도는 메아리일 뿐이다. 하물며 교육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한자어에서 가르친다는 것을 斅(가르칠 효)라고 한다. 배움에 두드림을 합(學+攵)한 글자이다. 즉 가르침은 배움에 더하여 두드림이 필요한 것이다. 두드림이란 방향 제시와 길 안내이며 責善과 是是非非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배움과 그 배움을 실재에 적용하는 실천이 없이는 스승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왜 아이들이 말을 거칠게 하고, 폭력적이 되었을까? 문제에 대한 분석도 중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적 병리 현상인 것이다. 어떻게 하자는 외침도 중요하고, 외침에 귀 기울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된 현상의 일부는 ‘나, 우리의 가정과 사회, 어른’에게 있지는 않을까 하는 사고의 접근이 더 문제 해결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은 아닐까?

 

스승을 나타내는 글자인 師는 阝(阝←阜: 언덕 부)+帀(두를 잡)으로 이루어져 있다. 스승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무리 중에서 자연적으로 선택되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사람이 갖추고 있는 자질과 능력, 태 도 등을 보고 무리들이 자연스럽게 지도자로 모시고 따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닌 것을 아니다.’라고 할 수 있는 엄격함과 지혜를 요구하는 것이다.

 

스승이 학생을 잘 가르치려면 배움이 함께 해야 크게 되는 것이다. 이 음식은 짜다고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접 맛을 보고 느껴야 이치를 알고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이란 과정은 보이지 않은데 수많은 반복으로 몸이 느끼고 따라가는 것이다. 書라는 글자가 聿+曰로 이루어진 이유인 것이다. 글공부는 말로 하고 손으로 직접 써야 한다는 깊은 이치가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위에서 사용하는 낱말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사용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런데 멀리를 중요시 하고, 더 나아가 외국의 것에만 매달리는 현실은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가?

 

가르침이란 배우도록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부족함을 알아서 스스로 반성하게 되고 그 과정의 힘듦을 느낀 후에 대처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배움의 과정에서 외우고 반복하는 것이 아닌 ‘왜 이러지?’ 하는 원리를 깨닫는 과정을 통해서 즐거움으로 나아가는 길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 가르침이다. 이것을 가르침과 배움이 함께 큰다고 말하는 것이다. 말에게 수레를 끌게 하려면 말을 수레 뒤로 보내어 먼저 어미 말이 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때 어미 말은 어떤 말이어야 하는가? 교육 현장을 멀리서 보기만 했던 사람이 스승의 길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려는 행태를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교육 현장이 왜 우리의 골칫거리가 되었을까? 우리의 정체성을 외국에서만 찾고 있는 것에서가 아닐까? 아니면 우리가 갖고 있던 스승과 제자 사이의 마땅한 도리, 교육이념, 교육방법 등을 우리가 제대로 배우거나 가르치지 못해서, 스승과 제자가 함께 공부하는 학문의 길벗이 아니라 가르침을 강요하고 강요받는 갑을 관계로 만든 우리들의 생각 없음 때문은 아닐까?

 

교육! 백년지대계라고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교육을 노래하고, 현장의 어려움에 눈물을 삼켜본 사람, 다양한 위치에서 곤란의 경험을 깨달음으로, 그 깨달음이 철학으로 몸에 배인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을 이겨서 능히 해낼 수 있는 ‘克明德’의 지도자는 없는 것일까? 아니면 숨어버린 것일까? 세상은 만나야 할 곳에서 맞물려 돌아가야 할 그 사람을 찾고 있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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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그 사람 - 미래교육포럼 공동대표 문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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