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아마 모든 학교는 학생들을 맞이할 준비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준비하는데 그렇게 바쁘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학생들에게 무엇 때문에 학교에 가느냐고 물어보면 ‘배우러 간다.’고 십중팔구는 말할 것이다.

 

그럼 무엇을 배우러 가느냐고 물었을 때, 들려오는 대답은 각양각색이고 천양지차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정답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많이 배우는 것은 要約을 잘해서 가장 쉽고 이해 가능한 낱말로 목표 지향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일 것이다.

 

말 속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경험으로 보았을 때, ‘工夫’라고 말하는 학생이 가장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工夫’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알면서 왜 묻지?’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구체적인 대답에서부터 추상적인 수준으로까지 다양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공부에 대한 대답이 유치원생과 교수는 달라야 하는가? 文獻에 따르면 글자 창제의 분명한 목적은 백성들이 나라에서 하는 일을 이해하고 군주는 백성의 삶을 이해하고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서, 즉 국민을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우리 아이들은 글자 때문에 기쁨보다는 어려움을 겪고 배움을 귀찮은 일로 폄하하게 된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배운 사람이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낱말이나 외국어를 쓰는 것이 당연히 하고 있다. 그래서 대화 도중에 우리말보다는 외국어를 더 많이 쓰고, 듣는 사람은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고, 정자로 쓰지 않고 우리말로 갈겨쓰는 사람이 존경을 받고 있지는 않은지? 과연 이것은 바람직한가?

 

지식층의 이런 사태는 우리 학생들에게 무엇을 지향하게 할 것인가? 외국의 글과 외국인은 우수해서 그들을 본받고 따라야 할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가? 漢字와 한글의 창제 원리에 따르면 많이 배운 사람은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서 듣는 사람이 재미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공부는 생각지도 않는 기쁨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진실로 배운 사람은 어린이집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學者는 두루두루 배워서 어떤 사람이라도 수긍하도록 要約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서면서 무엇을 배워야 하고, 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 지가 명확하다면 어른과 아이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추구하는 방법이 일치되고, 실천도 쉬울 것이다. 학교에서 道德을 교과목으로 가르치는 데 道德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지도는 이루어지고는 있는 것일까?

 

‘道德’이란 무슨 말이며 어떤 유래를 갖고 있으며,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주어진다면 우리 아이들이 道德을 대하는 태도 또한 진지해지지 않을까? 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교과서를 받을 때 각각의 교과목 이름에 관한 진지한 설명, 왜 이런 교과를 공부해야 하고, 배우고 나면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에 대한 상호 진지한 대화의 시간이 이루어진다면, 교과목을 대하는 마음 또한 설레임으로 다가서지 않을까?

 

작년 전남 화순 어느 학교에서 서울서 오신 교수님과 함께 ‘속뜻 국어사전’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행사를 가졌는데, 그 때 교수님께서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어려움이 무엇이냐는 물음이 있었다. 4학년 남학생한 명이 일어섰다. 우리들은 학교 폭력 등의 이야기가 나올 줄로 생각하고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학생의 대답은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교과서 낱말의 뜻을 알 수 없어서 어렵다고, 더 나아가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낱말의 뜻을 몰라서 어렵다는 대답을 하였다.

 

일부 전문가들은 성공하려면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누군가?’ 그리고 ‘그 사람이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 학생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학생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요즘 ‘나를 찾고 있는 사람은 있기는 한가?’ 하는 자괴감이 들 때가 많다. 이제까지 나를 채워 줄 사람만을 찾고 있지는 않았는지? 내 생각을 강요만 하지는 않았는지? 우리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 애들은 왜 이러지 하면서 ‘과거는 옳고 현재는 그르다.’고 하는 억지 논리를 펴지는 않았는지?

 

우리가 아는 세상의 한계는 곧 내가 갖고 있는 ‘언어의 한계’라는 루브비히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언어가 끝나는 순간 우리의 생각도 멈춰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언어를 통해서 공유되어 사상으로 발전하고 사회 안정과 발전의 기틀이 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지?’ 하는 한탄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 진지한 물음과 함께 우리 아이들이 느끼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묻어난다. 우리 아이들이 겪고 있는 고충을 들어주고 함께 풀어가는 과정을 공동으로 연구하고 실천하는 길을 모색하는 고민의 장을 말로만 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지금이다. 지금의 상태, 즉 현재를 인정함으로써만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말은 쉬워도 자신의 현재, 특히 부정적인 측면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실수나 고통, 사회의 모순 등을 확대 해석하는 즉, 부정적인 현상을 돋보기로 보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우리 어른들의 말과 행동이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진솔한 물음이 필요한 시기다. 개는 잘 짓는다고 좋은 개가 아니고, 사람은 말을 잘 한다 하여 어른이 아니다.

 

인생이란 힘들 때는 힘든 쪽으로 집중학고, 학생 시절에는 공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얽힌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어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아이들의 현재 모습으로 그 학생의 일생을 예단하는 일은 없는지? 흔히 아이들은 나라의 미래 혹은 희망이라고 말하면서 현재 그들이 안고 있는 어려움을 사실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사람! 우리 아이들이 목마르게 찾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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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이들이 찾고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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