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교육연합신문=문석주 기자]

 

'신사의 나라'이자 '여왕의 나라'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에게는 국보 제191호 황남대총금관과 제192호 금허리띠, 보물 제630호 관 꾸미개를 함께 소개했다. 금관은 순금으로 만든 것으로 나뭇가지와 사슴뿔모양으로 된 세계적 걸작품이다.
허리띠에는 곱은옥·물고기모양판·손칼모양장식 등 다양한 물건을 본떠 만든 장식이 달려있다. 금관과 허리띠, 관 꾸미개 등은 왕족의 위세품이자 장송의례용으로 보인다.

 

한국의 문화유산 가운데에는 세계에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적지 않다.그 중에서도 신라 금관은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금관은 어떤 유물 전시회에 내놓아도 찬란하기 이를 데 없어 지금껏 조명을 한 몸에 받아왔다.

 

그러나 1921년에 경주에서 금관총이 우연히 발견되기 전까지 아무도 이런 엄청난 금관이 있는 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특히 1975년 경북 경주시 황남동에서 신라시대 고분 황남대총(皇南大塚)이 발견됐는데 이 무덤은 남북 길이 120m, 높이 22m로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조사 결과 황남대총은 두 개의 무덤이 합쳐진 것으로 남쪽에는 왕인 남자의 무덤, 북쪽에는 왕비인 여자의 무덤으로 밝혀졌으나 이상하게도 왕의 무덤에서는 격이 낮은 금동관이 출토되고 왕비의 무덤에서는 장식이 뛰어난 수준 높은 금관(국보 191호)이 발굴돼 의문을 남겼다.

 

금관을 자세히 살펴보면 높이 27.5㎝, 아래로 늘어뜨린 드리개(수식) 길이가 13.0∼30.3㎝인 왕비의 금관은 이마에 닿는 머리띠 앞쪽에 出자형을 연속해서 3단으로 쌓아올린 장식을 3곳에 두고, 뒤쪽 양끝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2곳에 세웠다.

 

푸른 빛을 내는 굽은 옥을 出자형에는 16개, 사슴뿔 모양에 9개, 머리띠 부분에 11개를 각각 달아 화려함을 돋보인다.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는 이 금관은 어떤 연유로 왕비의 무덤에서 나온 것일까. 이 무덤의 주인이 여왕이었다면 수수께끼가 쉽게 풀리겠지만 남쪽 고분은 왕의 무덤이 틀림없다는 것이 학계의 분석이다.

 

남자의 무덤에서는 비록 금관이 아닌 금동관이 출토됐지만 금 허리띠(보물 629호)와 화려한 칼 등 신라시대 왕이 사용하던 장신구가 대거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누구의 무덤인지 확인하기 위해 학자들이 매달린 결과 눌지(재위 417∼458년), 내물(재위 356∼402년), 실성(재위 402∼417년)의 세 명의 마립간(麻立干·신라시대 임금의 칭호) 중 하나인 것으로 압축됐으나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문제는 또 있다. 도대체 이렇게 독특한 금관의 양식이 어디서 왔느냐는 것인데 학계는 크게 두 가지 설로 나뉘어 있다. 다수설은 이 금관이 시베리아 샤먼들의 관을 본떠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왕관에 있는 장식을 꼽을 수 있는데 우선 앞부분에 있는 나무 장식은 인간계와 신계를 연결하는 신목을 본뜬 것으로써 3단으로 된 일곱 개의 나뭇가지는 당시 샤먼들이 생각하는 7층의 하늘을 이미지화한 것이라는 설이다.

 

같은 맥락에서 왕관의 옆 부분에 있는 장식은 사슴뿔을 이미지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시베리아에서는 사슴이 하늘과 지상을 왕래하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고 여겼는데 그 유명한 '루돌프'도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내관에 있는 새 날개 모양의 장식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옛 기록을 보면 장례를 할 때 큰 새의 깃털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 깃털이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보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 의견에 반박하는 학자들은 왜 엄연한 국가의 수장인 신라왕이 아직 유목 사회에 머물러 있는 시베리아 무당의 관을 쓰느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아울러 시대적인 오류를 지적하기도 하는데 5~6 세기의 신라 왕관과 18~19세기의 시베리아 샤먼의 관을 비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 이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왕관의 장식들을 어떻게 해석할까? 우선 나무 장식은 시베리아의 신목이 아니라 자신들의 시조인 김알지가 내려온 나무의 가지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같은 맥락에서 관의 옆에 있는 장식도 사슴뿔이 아니라 나뭇가지로써 금관에 붙어 있는 동그란 딱지들은 나뭇잎으로 해석한다.

 

이 금관을 둘러싸고 양분되는 설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이 금관을 실제로 썼느냐 하는 것 인데, 실제 사용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단지 무덤의 부장품으로만 썼다고 주장한다.

 

이 설을 지지하는 유력한 근거로 우선 금관에 걸려 있는 옥이나 금딱지가 너무 무거워서 왕관이 이를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관을 직접 썼다면 머리가 닿는 부분에 비단이나 가죽 같은 것을 댄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른 주장을 펼치는 학자들은 왕들이 이 금관을 항상 썼던 것은 아니더라도 특별한 경우에는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 금관에는 특수한 공법이 적용됐기 때문에 금관이 머리위에 바로 서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한다.

 

금관에 있는 금판의 가장자리를 살펴보면 작은 홈이 촘촘하게 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금판이 힘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기술로써 홈이 금판을 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학자들에 의하면 꽤 세련된 기술이라고 한다.

 

외관상 화려하게 치장한 이 왕관을 매일 쓰고 있을 수는 없을 지라도 국왕의 권위를 크게 떨칠 필요가 있는 경우에 분명 관을 착용했을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의견이다.

 

▲금허리띠

 

황남대총의 북쪽 무덤에서 금관과 함께 발견된 국보 제192호 금허리띠(과대)는 직물로 이뤄진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인 허리띠로서 길이 120㎝, 띠드리개 길이 22.5∼77.5㎝이다.

 

28장의 판(板)으로 만들어진 이 허리띠는 주위에 있는 작은 구멍들로 미루어 봤을 때 가죽에 꿰매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리띠 아래에 매달려 있는 13개의 띠드리개는 경첩으로 허리띠와 연결했다. 이 허리띠와 띠드리개는 출토될 당시 상태가 아주 좋아서, 착용법과 띠드리개의 배치순서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관꾸미개

 

또 보물 제630호로 지정된 관 꾸미개는 높이 45㎝, 날개 끝 너비는 59㎝로 3매의 금판으로 구성돼 가운데 금판 좌우에 새 날개 모양의 금판을 작은 못으로 연결했다. 전체적인 모양은 가운데 금판이 돌출되어 있어 산(山)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아랫부분은 차츰 좁아져서 V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전면에 작은 원형 장식을 달았으나, 가운데 금판 밑의 관에 꽂게 된 부분에는 장식이 없다. 관 장식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점을 찍어 처리했지만 가운데 금판은 세로 중심선에서 안으로 약간 접은 상태여서, 밑의 뾰족한 부분은 무엇인가에 꽂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1500여 년의 세월동안 단 한 번의 도굴도 허용치 않고 총 2만2000여점의 유물을 쏟아낸 황남대총 이후 신라 무덤에서는 황금 유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립간의 등장으로 상대 우위를 드러낼 상징이 필요했고 그에 부합하는 것이 금이었지만 마립간이 없어진 후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황남대총의 황금유물들이야 말로 신라 최후의 '금빛 찬란한 예술'인 것이다.

 

자료제공-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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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 국립중앙박물관 명품 유물 2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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