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교육연합신문=편집국]

 

박계승 교육칼럼리스트

 

최근 카이스트(KAIST) 학생들의 잇따른 자살로 인해 교육계 안팎이 술렁이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화려하게 출발한 서남표식 교육개혁이 도마에 오른 것이다.

 

카이스트의 무리한 개혁은 젊은 과학도들을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 아래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곳엔 미래 과학의 탐구자들이 아닌 영혼을 잃어버린 학습기계만이 존재했던 것이다.  


카이스트가 시행 중인 성적에 따른 징벌적 등록금제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망국적 교육방법이다.

 

연구하는 카이스트인을 위해 새롭게 도입된 이 제도는 미국식 성과주의의 잘못된 모방이며 반인권적, 반교육적 행위이다. 카이스트의 학생들은 성적이 '3.0'만 넘으면 모두가 전액(100%) 장학금을 받는다.


하지만 그 이하일 경우 점수에 따라 연간 최고 1500만원의 징벌적 등록금을 내야하기 때문에 성적에 대한 부담이 매우 크다.

 

혹자들은 미국 명문대학의 경우도 장학금 지급 성적이 '2.5' 이기 때문에 그리 가혹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평가방식에 대한 명백한 오용이다.


미국의 대학들은 학업성취도가 일정 수준 이상만 올라가면 되는 절대평가 방식이지만 카이스트는 결과에 대한 상대평가 방식이다. 한국 유수의 대학들이 카이스트와 같은 상대평가 방식을 따르는데 이는 무한경쟁을 통해 학습성과를 높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경쟁자들을 반드시 이겨야 하기에 학습결과 측면에서 보면 일면 의미있는 평가방식이지만 동료가 적이 되고 학업성취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살까지 불러왔다면 이는 결코 올바른 교육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징벌적 등록금제는 결과만을 중시하는 한국교육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학습자들을 성적순으로 세우고 그것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현실에서 창의적 능력을 발휘하기란 매우 어렵다.

 

더욱이 결과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양심적인 행위를 죄의식 없이 행하도록 조장하는 꼴이 된다.

 

전과목 영어수업도 문제다. 영어수업이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면 이는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글로벌세계에서 영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써 매우 유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교과목을 영어로 수업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린 필리핀처럼 영어를 제2 공용어로 하지 않는다. 당연히 수업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교수자의 설명을 학습자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강의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이 때문에 교과교육이 아닌 영어교육이 되고 만다.

 

민족적 정체성 혼란 또한 야기될 수 있다. 언어는 정신을 지배한다. 한족에 흡수된 만주족의 예를 보라. 일제치하에서 조선어학회가 모진 탄압을 무릎쓰고 우리말을 지키고자 한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어수업은 단순히 실용적 가치만을 두고 행할 일이 아니다.


성과지상주의가 만들어낸 작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선조들은 교육을 백년지계(百年之計)라 하여 오랜 시간을 두고 행했다. 단기간의 지식 전수가 아닌 지혜로운 인간의 양성에 초점을 두고 행한 것이다. 이는 모든 학문의 중심에 인간이 있음을 의미한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함은 백년지계의 핵심인 것이다. 징벌적 등록금제와 전교과 영어수업은 당장의 이익을 위해 더 큰 것을 놓치는 우매한 일이다. '旁岐曲逕(방기곡경)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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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징벌적 등록금제는 망국적 성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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