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교육연합신문=편집국]

 

박계승 교육칼럼니스트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합니다. 이 말은 배움이 깊을수록 겸허(謙虛)해 진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요.

 

학문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가르치다 보면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따라서 스승은 부족한 곳을 더 공부하여 제자에게 익히게 하며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남김없이 받아 더욱 학식이 풍부한 인재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스승의 가르침이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살아가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교양과 지혜의 전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은 예로부터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를 다스리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자연 상태의 미숙아가 성숙아가 되기까지의 돌봄, 즉 인간의 교육이 살아남고 생존하기 위한 기술의 터득이라면 굳이 ‘백년지계(百年之計)’라 하여 유난을 떨 필요도 없고, 선거철이면 중점 공약 사항으로 교육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풍경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열을 가진 나라 한국. 어찌 보면 다사다난했던 민족사(民族史)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삶의 총체이며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에 인류와 함께 지속되어 온 교육이야말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사회를 포스트모던 사회(Postmodern Society) 또는 다원주의 사회(Pluralism Society)라고도 합니다. 이들 사회는 정형화된 가치를 지양하며 다양성을 존중합니다.

 

현대의 교육 또한 다양한 가치를 받아들임으로써 전근대적인 교육의 모습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는데요. 다원화된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을 위해 학습자 개개인에 맞춘 교육방법이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교육현장에서 적지 않은 문제 사태를 발생시켰으며 교육의 본래 목적을 훼손하고 집단 내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기계인간을 만드는 부작용을 가져왔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공공의 가치를 지향하며 개인의 이상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교육을 한다는 것이 다소 모순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시쳇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자식 교육이라고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혈연집단인 가정에서조차 1차 교육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상황에서 공공의 성격이 강한 학교가 교육 주체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교육을 행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대학지상주의’에 빠져있는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교육의 본래 목적을 온전하게 달성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작금의 상황이 이러할진대 그냥 간과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교육을 포기하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경기도교육청에서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되었습니다. 체벌금지와 학생의 자율권 존중, 교육현장에서의 학생인권 강화가 핵심인 이번 조례안을 두고 교육계 안팎에서 기대와 함께 우려의 목소리도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교육현장에서 학생의 인권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특수한 관계로 인해 약자일 수밖에 없는 학생들의 인권 유린은 결코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의 잘못된 인권 의식이 오히려 학교현장에서 많은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례로 수업 중 웃고 떠드는 학생에게 몇 차례 주의를 준 후,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자 퇴장 조치를 시켰더니 그 아이는 학생인권을 운운하며 계속 교사에게 저항하더랍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수업 시간에 자는 학생에게 담당교사가 일어나라고 깨웠더니 내가 잔다는데 무슨 참견이냐고 욕설까지 퍼붓는 학생에게 교사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른 학생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문제 학생을 다독이든지 아니면 교육적 차원에서 즉각적인 벌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 선택이 모두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땜질 처방이란 비난을 받을 것이고, 후자는 학생인권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사한 상황이 교육현장에서 무수히 반복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교육이 될 수 있을까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생인권 강화에 맞춘 올바른 인권 교육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인격이 아직 미완성된 아이들에게 인권이란 결코 자유방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책임 있는 권리 행사만이 진정한 인권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시켜야 할 것입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교육을 무한경쟁 사회와 연결시켜 서비스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육에 비즈니스 개념이 적용된 것인데 이는 옳지 않습니다.

 

교육은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수요와 공급이 있기 때문에 경제법칙이 적용된다면 교육의 본래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서비스란 수요자 중심의 교육을 의미합니다.

 

일면 타당한 말입니다만 이는 공급자인 교사의 역할을 잘못 이해한 것에서 기인합니다. 교육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일방향성이 아닌 쌍방향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교육 또한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기에 단순한 비즈니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고 합니다. 교사의 질을 어찌 교과 지식만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교과 지식뿐만 아니라 교육적 열정, 그리고 참된 스승으로서의 소명의식 바로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참교사로서의 덕목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이러한 선생님들이 학교를 지키고 있는 한 한국교육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습니다.

 

모든 교육주체들이 웃을 수 있는 즐거운 학교를 위해 오늘도 교육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든 선생님들께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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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학생인권조례’ 교사로서의 역할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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