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식 칼럼]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삶, 평범을 자처한 삶의 품격과 향기

입력 : 2026.05.07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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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연합신문=김춘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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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 드 베랑저(Olivier de Berranger) 주교

인생의 정점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앉는 것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용기다. 성취와 효율만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프랑스의 올리비에 드 베랑제(Olivier de Berranger, 1938-2017) 주교가 남긴 삶의 궤적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마무리'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다. 

 

베랑제 주교의 생애는 국경과 지위를 초월한 헌신과 겸손의 결정체였다. 그의 한국 인연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으로 시작되었다. 1976년부터 17년간 '오영진'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살았던 그는 화려한 사목 활동 대신 가난한 이들의 곁을 선택했다. 그는 프라도사제회가 한국 가톨릭교회에 뿌리내리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이 땅의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 울고 웃었다. 

 

프랑스로 돌아간 뒤에도 그의 가슴에는 늘 한국이 살아 있었다. 1996년 생드니 교구 주교로 서품된 후, 저서 『서울의 예수, 생드니의 예수』를 통해 두 나라 소외된 이들의 삶을 증언했다. 특히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에는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지 않고 감싸 안는 인내와 민족애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분단의 상처를 보듬기도 했다. 

 

주교라는 권위의 정점에 도달했을 때조차 그의 마음은 늘 프라도 사제로서 서약했던 초심의 자리를 향했다. 은퇴 후 행보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성찰을 안겼다. 그는 주교의 지팡이를 내려놓고 프라도회가 시작된 리옹의 가난한 동네에서 홀로 숙식을 해결하며 살기를 자청했다. 말년에는 고향 양로원에서 '주교님'이 아닌 친근한 형제로서 노인들과 똑같은 처지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 지위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진 인간 본연의 숭고함을 몸소 증명해 보인 것이다. 

 

이러한 삶은 직위와 명예를 인생의 성적표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내려놓은 '직함'이 아니라, 그 자리에 새롭게 채워진 '삶의 품격'이다. 이는 퇴임 후 과거의 위신을 뒤로하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아이들과 눈을 맞추는 독일 교육자들의 성숙한 직업 윤리와도 궤를 같이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재직 시절의 위세에 갇히지 않는 용기다. 원숙한 경륜이 박제된 훈장이 아닌, 학교 현장의 실질적인 활력으로 환원되는 선순환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최근 우리 곁에서도 이러한 가치의 실천을 통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례를 만날 수 있다. 전남 강진교육지원청의 최 모 전 교육장의 행보가 그러하다. 그는 평생을 바친 교단에서 최고의 영예인 교육장까지 역임했으나, 퇴임 후 안락한 원로의 자리를 사양했다. 대신 최근 강진의 외국인 유학생 중심 직업계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분필을 들었다. 화려한 의전 대신 타국 학생들의 서툰 한국말을 다독이며 교육자의 초심을 현장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주교에서 평범한 노인으로 돌아간 베랑제 주교처럼, 교육장에서 임시교사로 돌아간 그의 행보는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 오직 '스승'이라는 이름의 진정성만을 남겼다.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오히려 세상을 밝히는 이들의 삶은 기술적 풍요 속에서도 우리가 결코 잃지 말아야 할 인간의 품격과 온기가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결국 이들이 보여준 삶의 궤적은 우리 사회 전반의 의식 개혁을 요구하는 묵직한 화두다. 전문성이 사장되지 않고 사회적 자산으로 재투입되는 환경, 위계의 옷을 벗고 존재 그 자체로 기여하는 이들이 존중받는 풍토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성숙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러한 겸손의 선순환이야말로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유산이자, 우리 시대가 마주해야 할 '준비된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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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식

동신대학교 에너지경영학과 교수이자 한국독일사학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의 교육, 독일의 직업교육과 평생교육을 만나다』(포스텍융합문명연구원; 소명, 2025) 등이 있다.

◇ 교육연합신문 논설위원

◇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한국독일네트워크(ADeKo) 이사 겸 인문교육위원장

◇ 2024 칼만 해외석학(독일 연방교육연구부, 아헨공과대학교)

◇ 前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 前 국가교육위원회 미래과학인재양성특별위원회 전문위원

◇ 前 한국전문대학평가인증위원회 부위원장

편집국 기자 news@eduyonha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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