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전준우입니다..jpg

최근 지인에게서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소개해주신 분이 평범한 분은 아니었는지라 소개해준 곳도 그런 곳이겠거니 생각했다.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면접 일정을 잡고 미팅 자리에 나갔는데, 동네 이장님이 한 분 앉아계셨다.
"반갑습니다. 아무개 마을 이장 이 아무개입니다."
앞니가 하나 빠진 얼굴로 호탕하게 웃으시는데, 영락없는 동네 어르신이었다.

내용인즉슨, 시골 마을에서 사회적 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있는데 사무일을 봐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신축건물을 짓고 있으니 우선은 '마을 경로당'에서 따뜻하게 보일러 켜놓고 일하면 된다고 하시며, 내가 처음 사회생활할 때 받던 연봉을 제시했다. 직책은 사무국장이었다.

 연이은 실패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다소 적다 싶은 연봉과 경로당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가치였다. 더 높은 연봉에 화려하게 보이는 일자리는 차고 넘치는 시대 아닌가. 공업도시의 특성상 글이나 쓰고 컨설팅하는 일만으로는 밥벌이가 어려웠으나, 그렇다고 해서 배울 점이라고는 단점밖에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과 별 볼 일 없는 일을 하며 인생을 허비하는 건 내 성격과 맞지 않았다. 나는 이장님에게 '이제는 무슨 일을 시작하던지 300년 뒤에도 의미 있는 일이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고, 내 말을 들은 이장님은 즉시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사업은 천 년을 가야 되는 사업입니다."

그 말이 마음에 꽂혔다. 천 년을 가야 하는 사업이라면 다소 어렵고 힘들지라도 해볼 만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사장 타이틀을 가진 '이장님'은 '별로 하는 일은 없을 테니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쓰시라'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눈빛, 말투, 호탕한 웃음에서 웬지 모를 깊이가 느껴졌다.
 
이장님은 컴퓨터를 잘 모르는 분이었다. 무한잉크 프린터기가 왜 정품 토너보다 저렴한 지도 잘 모르셨고, 공인인증서가 언제 쓰이는지도 잘 모르셨다. 그렇다 보니 지방자치단체에 제출하기 위한 사업계획서를 쓰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독수리 타법으로 A4용지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사업계획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내심 끈기가 있는 분이구나, 하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80년대 후반에 국내 최고 명문 사립대인 K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학생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 이후 울산의 핵심 언론사인 모 신문사의 창립자라는 것, 상당한 사회적 위치를 가진 거물급 인사들과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이사장님은 나에게 그저 '생각보다 매우 일을 잘하시는' 동네 이장님에 불과했다. 상당한 발전 가능성이 있는 협동조합을 시작하게 된 이장님의 안목, 앞으로 350년 간 지역사회에 먹거리가 생길지도 모르는 역사적인 일 앞에 다양한 사업을 구상하고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난 이후의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두고 ‘까막눈’이라고 표현했다. 세대차이를 두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다.
 
언젠가 이사장님의 이력을 보게 되었다. 굵직굵직한 이력은 2,000년 이후에 시작되었다. 88년 대학 졸업 이후 2,000년 초까지 긴 공백이 있었다. ‘사람을 부당하게 감옥에 집어넣는 정부 밑에서 정직한 사람이 있어야 할 진실된 장소는 당연하게도 감옥’이라고 이야기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처럼, 스스로를 두고 ‘까막눈’이라고 표현한 그에게는 잊고 싶은 아픔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삶을 통해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곱씹게 된다.
 
올바른 정신, 올바른 신념이 그로 하여금 힘들고 고된 젊은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도록 인도했지만, 다만 그로 인해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올바른 일을 하게 되었다는 믿음이 있다면, 어쩌면 그의 젊은 시절도 빛으로 승화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생을 사는 동안 필요한 것은 지식과 정보의 습득능력이 아니라 진솔하게 삶을 대하는 자세에 답이 있다는 확신이 든다. 그를 통해 어떤 미래를, 어떤 신념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인가, 고민해본다.

 

전준우입니다..jpg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전체댓글 0

  • 41992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이장님, 그리고 이사장님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