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교육연합신문=文德根 기고]

요즘 코로나 19로 인하여 온 세계가 전쟁에 비유할 만한 중병을 앓게 되어, 그 끝을 찾는데 골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끝을 모르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고, 인간의 한계까지 의심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네 탓’ 공방만 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현주소다.

 

지금 우리 정치를 보면 노론과 소론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고 눈과 귀를 의심하게 된다. 이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서로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데 모든 언어와 행동을 총 동원하고 있는 이 현실, 도대체 국민들을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마치 조선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현대를 다스리겠다고 하니 ‘개나 소’가 웃을 일이다.

 

더 나아가 지도자 위치에 있는 종교인들은 국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잇속’만을 찾아 나서는 행렬은 어느 시대의 유물인가? 지도자층이 국민을 걱정하는 시대는 있었지만 국민이 ‘종교인’을 걱정하던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미증유의 병원균으로 세계가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다행인 것은 우리가 개발한 진단 장비(키트)가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고 더 나아가 한국의 방역대책이 모범적인 상황으로 세계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특히 의료인의 헌신과 열정, 국민들의 先進 의식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물건 가운데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먼저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찾기는 힘들다. 거의 모든 물건은 다른 나라에서 먼저 만들기 시작한 것을 우리가 따라서 다시 만든 것들이다. 그런데 전 세계에 코로나 19가 들불처럼 번지며 한국을 향한 각국의 ‘방역 SOS’가 쇄도하고 있다. 120곳이 넘는 국가에서 앞 다퉈 진단키트를 요청하는 통에 지원 순위를 두고도 고민이 깊은 모양새다. 특히 봉쇄 정책 없이도 코로나 19 확산을 저지하는데 성공한 한국의 대처 능력을 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과거나 외부의 것을 답습하기만 하는 訓誥的 사고나 기존의 틀 안에 갇혀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우리의 사고가 이제는 전략적 사고의 수준으로, 즉 선진국 수준으로 視線이 상승했다는 의미이다. 전략적 사고란 한층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는 뜻이다. 전략적 높이에서의 사고란 어떤 현상이 ‘좋고 나쁨’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새로운 변화, 짜임, 틀, 판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思惟(哲學)의 독립’이 국가와 개인 발전의 기초라는 것을 깨닫고 우뚝 섰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로 선진국의 자리를 차지한 나라는 지금까지 선진국이고, 후진국이었던 나라는 지금까지 후진국이다. 왜 그럴까? 선진국을 선진국으로 있게 하는 것은 시선의 높이에 의해 운영되기 때문이다. 시선의 높이가 생각의 높이이고,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이며, 삶의 높이가 바로 사회나 국가의 높이이기 때문이다. 이미 익숙해져 있는 기존의 시선을 바꾸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어떠한 문제일지라도 그 해결은 구체적 사건이 일어난 실재에서 풀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외국의 사례부터 따지고, 우리의 실재를 외국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것은 ‘二流的’이고 선진국의 것은 ‘一流的’인 것으로 보는 문화가 형성되고 말았다. TV 자막이나 토론자, 특히 아나운서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고 들으면 여기가 우리나라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여러 번이다.

 

더 나아가 외국어를 쓰고, 외국의 사례를 들면 훌륭하고 정답인 것처럼 포장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실재는 한국인데 외국의 사례로 한국을 해석하고 처방하려 든다. 한 예를 들면, ‘영어단어 무분별한 남발로 무슨 뜻인지 이해 안 돼, 한국사회 의사소통, 文解力 급격히 추락’(2019. 1. 30. 수. 동아일보)이라는 기사를 보면, 한국사회에서 영어는 성공의 언어로 취급되어 왔다. 특히 국제화가 불어 닥치면서부터 우리 사회의 무분별한 영어 사용은 더욱 극성을 부렸다. 학계든 언론계든 관료사회든 온통 영어 단어를 남발하거나 엉터리로 영어 단어를 갖다 붙여 사용했다. 그 결과 이제는 원활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말의 철저한 이해도 없이 외국어의 일방적 사용, 외국의 도량형 사용, 현실을 외면한 외국 이론의 차용 등은 우리 스스로를 생각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모두가 우리 문화와 우리 자체의 비하에 앞장서고 있으며, 영어유치원의 학비가 1개월에 100만원을 상회하는 것이 그 예가 되고도 남는다. 그래서 우리말을 잘 모른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한다는 의미다. 

 

이제 우리 문화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영역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 철학, 사상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우리 스스로의 움직임이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현재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꿈을 꾸어야 하는데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현재를 넘어서려면 증오만 하지 말고, 이제는 극복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자각해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끌고 가는 상위의 문화나 철학을 스스로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교육의 주도권이 대답보다는 질문에 있어야 한다. 대답은 과거를 따지는 일에 몰두하게 되고, 배운 것을 암기하는데 머물게 하는 반면, 질문은 자신만이 느끼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생각이다. 그래서 대답뿐인 교육은 과거에 갇히게 되고, 질문은 미래를 열리게 하는 것이다.

 

배움은 지식과 경험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응용해서 현재의 단계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이런 단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저 지식을 습득하는 일로 치부해버리거나 즐기고 소비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다가 세월만 헛되이 보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배웠으면 배움이 언어와 행동으로 익혀서 삶의 향기로 뿜어져야 한다.

 

코로나 19! 어떻게 예방하고 벗어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전개될 변화의 맥락이나 달라진 사회의 큰 흐름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전략적 사고일 것이다. 문제를 ‘좋다, 아니다’의 관점에서 ‘변화나 새로운 짜임’으로 보는 사유는 현재를 딛고 스스로 일어서는 힘이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인 것이다.

 

▣ 文德根 博士

◈ 陶山書院선비문화수련원 指導委員

◈ 前 康津敎育長

◈ 敎育學博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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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思惟의 獨立, 個人과 國家 發展의 基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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