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우리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하는 말이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은 시험 다음 날이 되면 자연스럽게 다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시험을 위한 학교 공부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물론 평가가 교육 활동의 과정상 불가피한 것이다. 문제는 과정과 수단이 목적과 본질을 훨씬 뛰어넘어 실행이 되는 것이다. 우리 교육은 평가를 위한 교육이 우선이니 모든 수단은 평가에 맞춰 정당한 과정이 무시된다. 지금의 대한민국 교육은 오직 대학입학을 위한 점수, 즉 평가를 위해서 과정은 무시되고 본질은 왜곡되고 있다. 그래서 한 마디로 우리 학교 교육은 시험에 의한, 시험을 위한, 시험의 교육으로 전락이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공부가 시험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공부를 잘해 고시에 붙어 엘리트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서 모든 고생은 끝이고 가문의 영광과 꽃길과도 같은 미래가 보장된다. 그런데 이 고시라는 것이 무엇인가? 뿌리 깊은 과거제도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시대부터 실시된 과거제도는 인재의 등용문이자 입신양명의 수단이었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그 정도가 극에 달했다. 그래서 이율곡은 9번이나 과거에 장원했고 어느 선비는 80세가 돼서 과거를 통해 벼슬에 등극한 사례도 있다. 


현대에 와서는 고시=성공=인생 역전 이라는 등식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 하듯 최근에는 9개월 공부를 통해 사법시험에 붙었다며 공부법을 알려주는 유튜브가 등장했다. 이에 따르면 한 변호사는 중·고교는 물론 대학교 때까지도 게임에 빠져 살다가 단 9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26세의 어린 나이에 사법시험에 붙었다고 한다. 말이 뻥튀기돼 전해져 내려오는 상술이겠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하니 허무맹랑한 소문이 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9개월 집중해서 공부하면 붙는 시험을 통해 권력 집단의 일원으로 상승할 수 있는 ‘고시 사회’, 그 과정이 어떠하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악습이 공정한 경쟁으로 찬양받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그저 씁쓸할 뿐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고시 합격자들이 진보와 보수 가리지 않고 지배 엘리트가 돼 과도하게 좌지우지한다. 이들은 공부의 달인으로 정해진 답을 빨리 찾기에는 귀신을 능가할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사자들이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에는 젬병이라는 것이다. 다른 문제를 제기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러니 그들이 사법농단으로 자신들과 그 소속 집단의 기득권이나 이권을 옹호하고 사수해 나가는 데만 교묘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리고는 힘없고 무지한 사회적 약자들을 희생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들에게 배움은 곧 시험이었고 시험은 단박에 벼락출세를 가져다줘 배운 지식으로 이 사회에서 타인을 지배하고 때로는 능욕도 불사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형식상 사법시험은 폐지됐지만, 여전히 시험용 공부라는 악습 속에 빠져 있다. 공부를 많이 했어도 시험에 붙지 못하면 쓸데없는 짓이 돼 버린다. 공부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니 기출문제 풀이와 다를 바 없게 된다. 단기 속성으로 합격해서 기득권으로 진입하는 공부가 최고다. 이처럼 공부를 출세의 수단으로 보는 도구주의적 관점이 계속 지배하는 한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봐야 소용없다. 공정 운운하며 시험 결과를 최우선으로 두는 고시 인간이 그러한 제도를 민주주의적으로 운용할 문화적 역량을 갖췄을 리 없다. 다만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과 출세의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웅시할 뿐이다. 이런 사회에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없고 오직 경쟁에서 이기려는 욕망과 이기심만이 존재한다. 우리 교육은 여기서 환골탈태 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부추기는 국민의 의식과 가치관은 시급히 바뀌어야 한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만큼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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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용 공부와 고시인간을 육성하는 교육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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