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흔히 하는 말 중에 “학생은 많으나 진정한 제자는 없고, 교사는 많으나 진정한 스승은 없다”고 한다. 학생이나 교사에게 모두 불명예스러운 말이기에 입에 올리기 망설여진다. 하지만 쓴소리는 귀에 거슬리나 행동에 유익하기에 다시금 숙고할 문제다. 각자의 가치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양자를 도매금으로 매겨 취급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작금의 세태를 반영하기에 씁쓸할 뿐이다. 언제부터 우리 교육 현장에 이처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회자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매년 종교적으로 이 세상에 신의 부활을 꿈꾸지만, 우리 모두의 인생의 길을 밝혀주고 인도해 주는 진정한 스승의 부활을 먼저 꿈꾸어야 한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 헤드(1861-1947)는 교사를 네 부류로 나눴다. 보통 선생은 지껄이고, 좋은 선생은 잘 가르치며, 훌륭한 스승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위대한 스승은 가슴에 불을 지른다고 했다. 여기서 잠시 선생과 스승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선생은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 스승은 ‘자기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그래서 우리가 단지 선생으로 남는 것보다는 지식 전달과 삶의 지혜를 함께 가르쳐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이 되고 싶은 것은 결코 지나친 욕심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단순한 선생으로 살아가기를 유혹한다. 그래도 부단한 학문의 연마와 자기 수양으로 이를 극복하고 스승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 땅의 교사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작금의 교육 현장을 성찰해 보자. 과거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예사말이 된 지 오래다. 그만큼 교사의 권위는 추락했다. 학생에게 매 맞는 교사가 있지 않나, 각종 소송에 휩싸여 치욕스럽게 직위를 유지하는 교사도 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생·학부모의 폭언 등 날로 심각해지는 교권침해와 교사를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현실은 이제 한계를 넘어섰다. 그래서 교권을 보호한다고 ‘교원지위법’을 제정하는 등 정부가 나섰다. 어찌 보면 이런 세태를 맞이한 것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처사라 탓할 수는 없다. 학교 현장에서 교사로서 낯부끄러운 일이 수없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모든 것이 인과 관계에 의한 귀결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 세상은 교사에게 스승으로서의 부활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 ‘군사부일체’처럼 스승에 대한 존경은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사로부터 변화의 물결이 시작돼 스스로 스승으로 거듭나는 노력이 우선이다. 교사는 제2의 부모로서 학생을 사랑으로 대하고 본인 스스로가 스승이라는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이래야만 비로소 우리 교육이 바로 설 수 있다. 교사 자신부터 학생과 학부모 앞에서 참된 스승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품격과 자질, 소양을 갖춰 스승의 자리를 되찾는 일이 절실하다.


아직도 역사 속에 유령처럼 배회하는 세월호 사건을 보자. 참사 현장에서 자신보다는 학생들을 끝까지 챙긴 승무원, 침몰하는 배 속에서 마지막까지 난간에 매달려 학생들을 대피시킨 교사 등 우리 주변에는 숭고함을 보여주신 분들이 많다. 이들은 모두가 스승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다. 스승이란 꼭 가르쳐야 얻는 호칭이 아니라 그동안 살아오면서 보여준 그 사람의 말과 행동, 모습, 인품에서 얻어지는 호칭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하고 절망할 때, 뜻하지 않은 일로 슬픔을 겪을 때, 건강을 잃어 생사를 헤맬 때 누군가의 말과 행동, 모습, 인품을 생각하여 힘과 용기를 얻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면 이가 바로 스승이다.


스승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많은 교사가 스승으로 거듭나야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영혼까지 움직이는 교육이 가능하다. 혼과 혼의 대화, 인격과 인격의 부딪힘, 정성과 호응, 정열과 정열의 만남이 있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스승의 부활, 이는 다시금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강력한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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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부활을 꿈꾸며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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