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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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중앙도서관, 가상국립도서관 시범콘텐츠 체험관 개관
    [교육연합신문=김세연 학생기자] 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도서관은 지난 3월 29일(금) 디지털도서관 지하 3층에 가상국립도서관 구축을 위한 시범콘텐츠 체험관(가칭 ‘스페이스 랩 Space Lab’)을 개관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개관한 스페이스 랩(Space Lab)은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도서관 콘텐츠를 이용자들에게 미리 선보이는 실험 공간이다. 첫 번째로 공개되는 ‘딱지본 이야기’는 ‘춘향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디지털콘텐츠로, 모션 인터랙티브 기술을 통해 이용자의 두 손의 움직임을 감지해 이용자가 직접 콘텐츠와 상호작용하는 체험을 제공한다. ‘딱지본 이야기’는 문화기술 연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구축됐다. ‘딱지본’은 1910년대 초반, 값이 싸고 부피가 작아 서민들도 휴대하기 편하게 제작된 소설책으로 표지가 딱지처럼 울긋불긋하고 화려한 색깔과 모양으로 채색돼 딱지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아울러 올해 하반기에는 이용자들이 직접 디지털 융합 콘텐츠 제작에 참여할 수 있는 저작도구와 온라인 참여가 가능한 메타버스 플랫폼을 서비스할 계획이다. 또한, 2025년 이후에는 △디지털 트윈 가상 서고 구현, △이용자 참여를 위한 디지털 에셋 제작 등을 위한 예산을 확보해 온·오프라인을 잇는 가상국립도서관 구축을 단계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은 가상공간에 실물과 똑같이 만든 물체, 또는 그러한 것을 만드는 기술을 의미한다. 디지털 에셋(digital asset)은 디지털 형태로 존재하는 콘텐츠나 파일의 자원화를 의미한다. 국립중앙도서관 김수정 디지털정보기획과장은 “이번 체험관 개관은 단순히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이용자들이 국립중앙도서관의 새롭고 다양한 실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연구자와 기업들에게 체험관을 개방함으로써 새로운 아이디어와 혁신을 탐색하는데 유용한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 뉴스종합
    • 사회
    2024-04-08

기획·연재 검색결과

  • [육우균의 周易산책] 파괴와 변화-'파리대왕'에 담긴 인간 본성의 철학적 고찰(산풍고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상전」에 산풍고괘를 보면 ‘바람이 산 밑에서 불다가, 산을 만나면 산을 휘돌아가면서 산의 모든 질서를 깨뜨린다.’고 되어 있다. 즉 바람ㅁ이 산을 휘돌아나가면 초목과 과실이 어지러이 흩어진다. 쇠락의 조짐이다. 이를 인간 세상으로 보면 아랫사람이 굴종하면 윗사람은 정체하니, 부패하는 세상을 말한다. 그러나 부패 자체에는 원시와 형통이 포함되어 있어서 거듭 변화한 다음에 질서로 돌아간다. 그래서 큰 내를 건너면 이롭다(移涉大川).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다. 이러한 변화는 일이라는 것이다. 일은 타락, 무질서, 파괴로부터 일어난다. 즉 썩어 문드러져야 비로소 진정한 일이 생겨난다. 혁명도 그러하다. 변화는 썩음, 파괴를 그 계기로 삼는다. ‘일’은 시(時)와 의(義)에 의해 나타난다. 시(時)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운명적, 종교적이다. 반대로 의(義)는 형이하학적인 것으로 우리 삶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시는 우연이, 의는 필연이 지배하는 것이다. 우연과 필연의 교착점에서 ‘일’이 만들어진다. 산풍고의 ‘고(蠱)’라는 글자도 그릇(皿) 속에 벌레(虫)가 세 마리(蟲) 들어 있다. 그릇은 생존할 수 있는 도구를 상징한다. 그것에 생존을 위협하는 벌레(독충)가 세 마리나 있다. 갑골문에 이 글자가 ‘저주’를 의미하는 이유다. 고괘는 부패와 파괴의 모습이다. 군자는 대중에게 리더십을 발휘하여 구체적인 사업을 대대적으로 감행하여야 한다.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 1983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 1954』에는 산풍고괘가 말한 무질서, 혼란, 파괴, 타락 등의 환경에 놓인 무인도에서 15소년이 겪는 갈등과 해결 방안을 이야기로 풀이한다. 즉 이 소설은 영국 소년들이 핵폭탄이 터져 영국 전역이 초토화 되어버린 상황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15명의 아이들만 무인도에 남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동인물인 랄프와 반동인물인 잭의 갈등이 주요 화소(話素)를 이룬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존재 양식적 삶을 지향하고 크로머는 소유 양식적 삶을 지향하듯이, 랄프는 존재 양식적 삶을, 잭은 소유 양식적 삶을 지향한다. 무인도의 소년들은 투표를 통해 가장 성숙해 보이고 잘 생긴 랄프를 대장으로 선출하고, 랄프는 성가대원을 이끌던 잭을 이인자로 포섭한다. 랄프는 나름 리더십을 발휘하여 지나가는 배들에 구조 요청을 하기 위해 불을 피우자고 제안한다. 소년들은 피기의 안경을 햇빛에 반사해 불을 피운다. 그러나 불은 잘못하여 정글까지 퍼지게 된다. 소년들은 심기일전하여 오두막과 봉화를 짓는다. 잭은 열심히 무인도를 탈출하려 애쓴다. 한편 잭은 돼지 잡는데 온 신경을 쓴다. 하지만 해변에 피운 불을 감독하는 임무를 소홀히 한다. 지나가던 배가 구조 신호를 못보고 지나치게 만든다. 그 일로 랄프와 잭의 사이가 벌어져 갈등이 시작된다. 한편 소년들은 산 위에서 짐승을 보았다는 악몽을 꾼다고 호소했다. 랄프와 잭은 산을 수색한다. 랄프 일행이 짐승의 그림자를 보고 기겁한다. 서둘러 무리에서 돌아온 후 잭이 랄프는 겁쟁이라며 놀린다. 이어 새로운 대장을 뽑자고 제안한다. 이후 무리는 분열한다. 잭은 돼지 사냥을 통해 얻은 고기를 미끼로 랄프 편에 선 소년들을 빼내오기 시작한다. 잭의 무리들은 야만인들처럼 얼굴에 돼지피를 칠하고 창을 들고 불 주변을 도는 광기어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소년들은 이에 동조한다. 한편 사이먼은 무리에서 벗어나 홀로 정글 깊숙이 탐험한다. 그러다가 산언덕에서 조종사의 썩은 시체와 낙하산이 바위에 매달려 있는 기괴한 형상을 목격하게 된다. 공포로 넋이 나간 상태에서 환상을 보게 된 사이먼. 그 앞에 파리대왕이 나타나 인간은 절대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며 비웃는다. 잭은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한다. 랄프 일행을 습격한다. 피기의 안경을 훔친다. 이 일을 계기로 서로 싸우게 된다. 결국 피기가 절벽으로 떨어진다. 홀로 남겨진 랄프는 잭의 일행에게 쫓기게 된다. 잭은 랄프를 잡기 위해 섬 전체에 불을 지른다. 섬을 덮친 대화재를 목격한 해군이 섬에 상륙한다. 무인도의 소년들과 조우하게 된다. 모두가 오열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작가는 제 1, 2차 세계대전에서, 전 인류의 역사를 통해 목격한 인간의 숨겨진 사악한 내면을 소년들이 조금씩 야만인같이 변질되어 가는 과정으로 묘사했다.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파리대왕’은 막연한 공포, 내재된 익명성을 상징한다. 인간의 생존 욕구가 인간을 가장 쉽게 타락시키는 심리적 기제임을 고발하는 것일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전쟁이나 학살을 벌인 지도자들이 가장 강력하게 내세우는 논리도 다름 아닌 생존이다. 생존 본능이 양심을 누르는 순간부터 악은 그 본능을 외부로 표출하기 시작한다. 즉 범죄를 용인하는 사회가 펼쳐진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주역』에서는 ‘진민육덕(振民育德)’이라 했다. 진민(振民)은 사회적 사업, 그러니까 구제사업이다. 육덕(育德)은 개인적 내면의 진실을 쌓는 사업이다. 진민은 외적인 것, 육덕은 내적인 것을 함께 해 나가는 것만이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썩어야 혁명이 일어난다. 일이 생긴다. 혁명이 일어나야 일시에 새롭게 바뀐다. 총이나 칼로 일어난 혁명은 부질없다. 인간의 의식이 변화되는 혁명이라야 한다. 그래야 그 혁명이 오래간다. 그렇기 때문에 ‘진민육덕’이다. 외부적으로 대대적인 구제사업을 추진하고, 내부적으로 개인들의 의식이 변화되도록 힘써야 한다. 산풍고의 ‘고(蠱)’라는 글자는 ‘고혹’이라는 단어와 같이 ‘너무 아름답고 매력적이어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든다’는 의미다. 마치 요즘의 마약처럼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게 만드는 독충이다. 그릇에 독충이 세 마리나 들어가 있다. 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데, 그 독충도 함께 먹는다. 병에 걸리거나 몽환적인 분위기에 빠지게 된다. 마약을 먹었을 때 느껴지는 증상과 유사하다. 이런 유혹에 빠지면 파괴, 저주, 혼란, 무질서가 득세하여 썩어 문드러져야 끝이 난다.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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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김홍제의 목요칼럼] ‘내 마음의 풍금’이 사라지는 익명 시대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1999년에 개봉한 ‘내 마음의 풍금’ 영화를 주말에 혼자 다시 보았다. 가슴이 설렌다. 풋풋하고 순수한 정서와 강원도 자연의 풍경이 아름답게 봄날 벚꽃처럼 피어난다. 메마른 현실 속에서 마음에 꽃등을 켜듯 가슴 한 쪽이 환해진다. 이 영화 원작은 한근찬 단편소설 ‘여제자’이다. 원작에서는 화자가 선생님이지만 영화에서는 학생인 홍연이 화자이다. 소설에서는 수하와 제자 홍연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지만 영화에서는 수하와 홍연은 35년 뒤에 부부가 되어 과거를 회상하며 낡은 LP 레코드를 듣는다. 전도연의 연기가 일품이다. 스승과 제자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순수하고 진솔한 인간관계에 대한 회상이 더 아름답게 다가온다. 2024년 상반기 스승찾기 정보제공 동의교원 명부를 보니 관내 중학교, 고등학교 교사 2,661명 중에 정보제공에 동의한 교원은 32명에 불과했다. 스승을 찾기 위해서 정보를 찾는 제자가 드물기도 하겠지만 32명은 너무도 작은 숫자였다. 이제 스승찾기 정보제공이라는 행정서비스는 머지않아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는 이제 자신을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익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자신을 찾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교 홈페이지 직원소개에도 교사 이름을 알 수 없도록 이OO, 김OO으로 되어 있는 학교가 대부분이다. 명예퇴직을 하는 교사들도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작년에는 제자가 찾아와서 흉기로 교사를 찌른 사건이 있었다. 제자가 스승을 찾아 감사인사를 올리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요구를 하거나 화풀이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교사들은 자신의 정보를 제공하기 두려운 것이다. 정보 공개는 악성민원인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풍토는 사라져가고 학교에서 ‘학생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는 농담으로 교사들이 자괴감을 느끼는 것이 현실이다. 올해도 나무는 봄이면 어김없이 꽃과 잎을 피운다. 꽃을 피우지 못하는 나무는 죽은 나무이다. 나무는 추운 겨울에 봄을 준비하여 새로운 관계를 맞이한다. 새로운 바람과 새로운 빛을 받아들인다. 교사는 학생을 가르쳐서 보내고 새로운 학생을 만나는 관계지향형 직업이다. 교사가 변화와 관계를 부정하면 교직에서 보람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릇 무수한 성현에게 위대한 스승이 없던 경우는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성현이 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사제 간의 관계는 세상에서 지극히 아름다운 관계라 할 수 있다. ‘당신 삶의 질은 관계의 질입니다.’ 유명한 동기 부여 연설가인 토니 로빈스가 한 말이다. 교사가 학생과의 관계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스티브 잡스는 ‘훌륭한 일은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관계를 외면하는 교사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인간은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지만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고 기쁨을 얻는 존재이다. 교사는 학생과 만나고 관계 맺고 제자를 가르치는 것에서 보람을 얻는 직업인데 사람을 멀리 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세태가 안타깝기만 하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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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육우균의 周易산책] 두 마음을 하나로 묶는 춤-친밀감의 본질(수지비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2001년에 상영한 김대승 감독의 멜로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를 본 적이 있는가. 이 영화는 아름다운 장면이 참 많이 나오는데, 그중 백미는 붉은 석양 무렵 모래사장에서 태희(이은주 역)와 인우(이병헌 역)가 왈츠 춤을 추는 장면일 것이다. 태희가 인우에게 말한다. “혹시 왈츠 춤을 출 줄 알아요.”하며 인우 손을 잡고, “남자는 왼발이 앞으로 나오고요, 여자는 오른발이 뒤로 나가는 거예요.”하며 왈츠 춤은 어느새 불그레한 석양을 배경으로 “짠-짜-자-잔”하며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봤음직한 서정적인 슬픈 선율인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가 울려 퍼진다. 참으로 아름다운 명장면이다. 두 마음을 하나로 묶는 춤이다. 이런 장면은 『주역』에서 수지비괘의 현실적인 모습이다. 「대상전」에 수지비괘를 보면 ‘땅 위에 물이 있는 모습이다. 이때 물은 빗물이다. 이런 빗물은 땅에 밀착되어 생명을 탄생시킨다. 땅은 물을 얻어 부드러워지고, 물은 땅 위를 흐르니, 친밀히 돕는 관계가 된다. 빗방울이 다정하게 흙을 품고 그 품에서 생명을 낳는 모습이다. 그것이 바로 친밀감의 본질, 두 마음을 하나로 묶는 춤이다. 그 관계는 서로 대등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은 대등하다. 다만 그 성질이 다를 뿐이다. 남성은 강한 성질, 여성은 부드러운 성질을 갖는다. 여성 속에 내재한 남성성을 아니무스라 하고 그 반대가 아니마다. 남성 속에 여성이 있고, 여성 속에 남성이 숨어 있다. 나(I)의 거울이 너(YOU)다. 일자가 스스로를 뛰어넘는 다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주역』은 이미 남녀평등사상을 지닌 책이다. ‘일음일양지도(一陰一陽之道)’라 해서 음과 양이 서로 동등하기 때문이다. ‘수지비(水地比)’의 ‘비(比)’는 갑골문을 보면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며, ‘등과 뼈를 붙여가며 말하는 모습’이니 밀(密)과 친(親)의 뜻이 있다. 비(比)는 친밀하다, 가깝다, 비등하다, 비교하다를 의미한다. 친밀한 감정, 단합, 가까움을 나타낸다. 1913년 영국 최고의 경마 경기 도중 시속 60km로 달리는 경주장에 한 여성(에밀리 데이비슨)이 뛰어들어 “여성에게 투표권을 달라”고 외쳤다. 에밀리 데이비슨은 말발굽에 치여 나흘 뒤 숨졌다. 이러한 에밀리 데이비슨의 행동은 세계사에서 남녀의 대등한 지위를 위한 중요한 순간의 하나였다. 이 사건이 있은 지 1928년이 되어서야 영국에서 여성참정권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러한 조짐들이 있었는데, 18세기에 현대 여성 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진 영국의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1759~1797)의 활동을 들 수 있다. 그때는 남성들이 여성을 본능적으로 무시했는데, 루소도 그런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는 그런 루소의 『에밀』을 읽고 분노하여 6주만에 『여성의 권리 옹호』라는 소책자를 쓰고, 아이를 낳고 산욕열로 사망한다. 이때 태어난 아기가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68혁명으로 페미니즘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는 18세기에 죽었지만 20세기에 근대 페미니즘의 선구자로 재탄생한다. 그녀는 남성을 즐겁게 하기 위해 여성의 외모와 행동거지를 가꾸게 하는 그러한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루소의 교육론에 분개했다. 문제는 생물학적 여성의 타고난 내적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 특히 교육의 부재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여성의 참정권에 대해 언급했다. 여성에게 보통선거권이 주어진 것이 1928년임을 감안하면 그녀의 주장이 얼마나 앞선 것이었는지 가늠하게 된다. 그녀는 코르셋 해방에서 미투 운동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변화의 맥박을 요동치게 했다. 또한 페미니즘의 급류가 사회를 휩쓸고 남성 지배의 족쇄를 부수고 대담한 내일을 향한 길을 만들었다. 영혼이 성별을 초월하는 세상을 꿈꿨던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는 “영혼에는 섹스가 없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녀가 세상에 던진 회의와 의문이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이라는 시대의 거대한 파도를 만나 최초의 페미니즘 선언서로 알려진 『여성의 권리 옹호』를 탄생시켰다.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의 딸 메리 셀리가 쓴 고전 공포소설이자 공상과학소설인 『프랑켄슈타인』은 죽은 인간의 육체를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창조된 몬스터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몬스터는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그 주변 인간들에게 고통과 파괴를 일으키며, 이를 통해 인간의 권력, 과학의 한계, 도덕적 가치 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프랑켄슈타인은 이 몬스터를 만들어낸 결과로 몬스터와의 복잡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창조물을 불완전한 존재로 여기고, 이를 부끄러워하고, 자신의 실패로 여기게 된다. 반면에 몬스터는 자신이 만들어진 이유도 모른 채 살아간다. 그는 인간 세상에서 고립되어 있으며,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존재를 찾아다닌다.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는 인간과 창조물 간의 복잡한 친밀한 관계를 다룬다. ‘어머니와 딸이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자로 활동한 것과 친밀감이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나?’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친밀감은 상호 평등한 관계가 전제되어야 생긴다. 남과 여가 지닌 권리와 의무가 동등해야 친밀감이 유지된다고 본다. 남성에게만 참정권이 주어지는 상황에서의 친밀감은 속 빈 강정이다. 현재 페미니즘 운동은 미투 운동으로까지 확산되어 사회에 구석구석 남성들의 편협되고 알량한 권력을 속아내고 있다. 이러한 사회 운동은 남녀의 친밀감을 더욱 가깝게 해주는 아방가르드적인 운동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관계는 우리 주변의 인간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로 되어버리기도 하며, 때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에게서도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친밀한 관계는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공감하는 것으로서 서로 간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 이 수지비괘의 효사(初6)에 “성실함이 있을 때 친밀함이 생겨난다. 성실함을 품기를 질박한 질그릇 술잔에 술이 가득 차듯이 하라. 다른 좋은 일이 있으리라.”고 했다. 상대방에 대해 성실함을 가지고 대할 때 친밀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왕따 문제도 사라진다. 남을 대할 때 성실히 하라. 질그릇에 술이 넘치는 것과 같이 성실한 태도를 보이면 남도 마음이 움직일 것이고 결국 서로 친해지게 된다. 나의 거울이 너다. 「대상전」에 보면 “건만국 친제후(建萬國 親諸侯)”라 하여 ‘선왕은 만국을 세우고 제후를 친하게 한다’고 했다. 이 말은 만민이 자기에게 친근하게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적극적으로 주변의 사람에게 먼저 친근하게 다가서야 할 것을 뜻한다. 진정한 친밀감을 받아들이려면 사회적 규범의 사슬에서 벗어나 시대에 뒤떨어진 현상 유지에 도전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먼저 말을 걸어 보자. 친절하게, 성심을 다해, 사람들에게, 동물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저 나무에게. 우리 마음의 실을 하나로 묶자. 친밀함의 춤은 성실함, 동정심, 우리를 갈라놓는 틈을 메울 용기에서 시작된다. 수지비괘의 효사를 보자. 지(地)의 자리다. 친밀함은 가까이 있을 때 생긴다. 어릴 때 학교에 가면 짝꿍이 있었다. 매우 가까운 사이다. 이 사이를 유지하려면 성실함이 있어야 한다. 그 ‘성실함 품기를 질박한 술잔에 술이 가득 차듯이’하라고 했다. 남성과 여성의 사이라면 서로 감응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띠게 된다. 남녀가 사랑하는 밑바탕이 서로에게 성심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인(人)의 자리다. 내 마음에 딱 맞는 친구는 없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 다른 사람도 내가 될 수 없다. 좋은 친구도 괜한 오해로 싸울 때가 있다. 그러므로 내적으로 마음 고생하지 말고, 외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수동적으로 내게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성실한 친구를 사귀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 보라. 좋은 친구를 만나거나 최고의 사랑을 쟁취하게 될 것이다. “나의 거울이 너다.”라는 말을 명심하고 행동에 옮겨야 친밀감이 생긴다. 천(天)의 자리다. 인간 관계를 수평, 수직 관계로 분류할 수 있다. 수직 관계는 하늘의 성질을 갖고 있다. 수평 관계는 땅의 성질을 갖는다. 그래서 수직 관계는 영광, 존경, 존중, 감사의 관계이고, 수평 관계는 평화, 화목, 친밀의 감정이다. 또한 수직은 상하 관계고, 수평은 평등 관계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이 높은 자리로 가면 수평 관계보다 수직 관계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수평 관계로 가야 한다. 수평 관계로 가면 주위에 사람이 들끓고, 수직 관계로 가면 주위에 찬 바람이 휭하니 불 듯 사람이 없다. 흉하다. 왈츠 춤을 전혀 못 추는 인우(이병헌 역)를 위해 태희(이은주 역)는 아낌없이 손을 내밀어 친밀감을 드러낸다. 그런 용기와 성실함이 두 마음을 하나로 묶는 춤을 출 수 있는 것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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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
    2024-04-01
  • [육우균의 周易산책] 노인과 바다 - 성대함과 삶의 본질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상전」에 뢰화풍괘를 보면 ‘풍요로운 시대에는 풍요로운 제사를 지내 온 국민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상책이다. 우려하지 말라. 만사가 형통하리라.’고 되어 있다. ‘뢰화풍(雷火豊)’의 ‘풍(豊)’은 그릇(豆)에 수확물을 가득 담아 놓은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로 ‘크다(大)’, ‘풍성함’, ‘충만함’을 뜻한다. 그런데 『주역』에서는 이런 성대함을 번개와 같은 순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대한 것은 반드시 쇠망하는 것이 천지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뢰화풍의 괘사를 보면 ‘풍요로운 시대에는 풍요로운 제사를 지내 온 국민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상책’이라 되어 있다. 효사를 보면 풍기부(비바람을 막기 위해 덧대는 문), 풍기패(햇빛을 가리는 큰 장막), 풍기부(거적때기 덧문), 풍기옥(건물의 처마를 하늘 높이 치솟게 하는 집)으로 점점 햇빛을 차단한다. 여기서 햇빛은 성대함이다. 그 성대함을 가리는 것이다. 건물은 거대해지고 그 속은 점점 어두워지기만 한다. 문명의 혜택으로 마천루는 햇빛을 보려고 계속 하늘 위로 올라가고, 그에 비례해 마천루의 높이만큼 그림자도 길게 드리워지는 것이다. “풍기옥 부기가(豊基屋 蔀期家)” 풍요의 시대, 그 차양도 함께 길어져 햇빛을 가리게 된다. 충분히 조심해야 한다. 여기 뢰화풍괘를 잘 보여주고 있는 문학 작품이 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다. 이 소설은 ‘성대함은 번개와 같은 순간, 즉 찰나라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 헤밍웨이를 만나러 쿠바로 가보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불필요한 미사여구나 과장도 없이 절제된 언어로 130페이지의 문장들을 통해 삶의 본질과 통찰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고전 문학이다. 노인은 84일째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노인을 비난하고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피한다. 그러나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빈곤과 불운의 생활 속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미끼를 정확하게 놓는 연습을 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빈틈없이 해내고 싶다.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게 되거든”이라며 망망대해를 나선다. 긍정적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노인의 관점은 앞으로 희망찬 미래는 도래하리라는 확신을 준다. 고기가 잡힌다. 그것도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커다란 청새치를 잡는다. 청새치와의 결투. 사투를 다한 싸움의 끝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승리했다는 성취감뿐. 하지만 그 싸움에서 우리는 누구보다 치열하고 뜨겁게 바다에 나가고 돌아오는 과정 속에서 존재론적인 의미를 느낀다. 우리 손에 생긴 상처와 남아있는 청새치의 뼈가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람은 삶을 살면서 그것을 주름으로, 손과 발로 증명한다. 절대로 머리로 증명하지 못한다. 실천은 머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손과 발로 해야 한다. 머리는 힘든 고통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머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역사와 문학은 손과 발을 기억한다. 청새치와의 혈투는 치열함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노인은 청새치를 잡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84일 동안 단 한 마리의 물고기를 잡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인생에서 목표를 이루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노인과 같이 치열한 노력과 끈기를 가졌을 때에야 비로소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삶을 위해 아등바등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청새치를 잡았지만 진정한 시련과 위험은 그때부터다. 상어의 공격은 인생에서 찾아오는 시련과 위기다. 노인은 도망가지 않고 상어를 물리치기 위해 칼을 뽑아 든다. 시련을 회피하지 않고 용기있게 맞서는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청새치를 먹으려고 달려드는 상어떼를 물리치기 위해 용기있게 맞서는 노인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노인은 여러 차례 상어떼의 공격에 맞서 싸운 후 청새치의 살점을 모두 빼앗기고 뼈만 남은 채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노인은 침대에 눕는다. 소년은 노인이 부탁한 커피와 부탁한 신문을 가져다 줄 것이다. 노인은 깊은 잠에 빠진다. 여전히 사자 꿈을 꾼다. 투쟁의 끝엔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치열하게 싸운 후 느끼는 승리감, 성취감이 전부다. 이것은 바다를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어서다. 노인은 바다를 남들처럼 남성형 관사인 ‘엘’ 마르라 하지 않고, 여성형 관사인 ‘라’ 마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엘마르는 바다를 싸워야 할 적이나 일터로 보는 것이고, 라마르는 바다를 큰 은혜를 가진 여성으로 보는 것이다. 인생 자체를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거기서 닥치는 시련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시련과 고통 없이 인간은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 삶은 덧없이 치열하다. 그 치열함 속에서 파괴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다는 존엄성을 갖고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려면 삶을 긍정적이고 희망을 가진 자세로 직면해야 한다. 노인의 ‘어부’라는 직업에 대한 자존심, 소명의식을 배워야 한다. 청새치와의 끈질긴 싸움과 상어 떼의 습격에 고통을 참으며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노인과 바다』에서의 압권이다. 노인은 숙련된 어부로서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그는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적 한계, 나이, 고독한 삶의 대가를 극복해야 한다. 노인은 그걸 증명했다. 인생은 치열한 싸움이다. 도전과 응전이다. 결국 파괴당할 순 있어도 패배할 수 없다는 자존심이 인내심을 만들고 결국 우리를 안온한 인생의 길로 이끈다. 노인은 내일을 꿈꾸며 돛대를 쥐고 돌아온다. 긴 투쟁에서 승리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생에서 만나는 시련과 고통을 견디는 힘이 결국 인생을 완성시키는 힘이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생 그것은 순간순간을 치열하게 흔적을 남기며 또 내일을 기약하며 살아가는 인내의 흔적이다. 노인의 마지막 다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어.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지.”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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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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